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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의 모습

영화 『페르시아어 수업』

아리마대 사람 2022. 12. 31. 15:37

2차 세계대전이 한창인 1942년 유럽, 나치의 포로 수송 차량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타고 있다. 포로 수송 차량 안에서 서로 어디 출신인지를 묻고 답하다가 어느 나라 출신인지는 의미가 없고 단지 유대인을 잡아가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옆에 앉은 유대인 남자와 대화를 나누던 벨기에 출신의 유대인 질(나우엘 페레즈 비스카야트 분)은 혹시 먹을 것이 있느냐는 남자의 간절한 요청에 자신의 샌드위치 반쪽과 그가 가진 페르시아어 책 '페르시아 신화'를 교환한다. 나치에게 잡혀가는 와중에 책이 무슨 소용인가 싶기는 하지만 초판본이라 귀한 책이며 평소 같으면 샌드위치 1,000개와도 바꿀 수 없는 책이라는 남자의 말과 그가 너무 배고파 보인다는 점이 질의 마음을 약하게 했다. 이때만 해도, 질은 샌드위치 반쪽과 교환한 페르시아어 책이 자신의 목숨을 구하리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포로 수송 차량이 한적한 숲 속 어딘가에 멈춰 선다. 나치 병사들은 유대인들의 가방을 한쪽으로 몰아놓고 넓은 구덩이 앞에 일렬로 세운다. 그러고는 대수롭지 않은 일을 처리하듯 총을 쏜다. 그렇게 무리의 절반이 순식간에 목숨을 잃는다. 이제는 질의 차례다. 질은 총을 맞기도 전에 미리 쓰러지는 척 연기하지만 나치 병사는 그런 질을 가소로워하며 겁박한다.

이 과정에서 질은 독일군 장교가 페르시아인을 찾는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때, 질의 목숨을 보전케 한 거짓말이 시작된다.
"나는 유대인이 아니다. 나는 페르시아인이다."
이 말의 근거는 품 속의 페르시아어 책이었다.

페르시아어 책이 질을 살릴 수 있었던 건 독일군 대위 코흐(라르스 아이딩어 분)의 꿈 때문이다. 병사들의 식사를 담당하는 코흐는 전쟁이 끝나면 동생이 살고 있는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 가서 식당을 열고 싶다는 꿈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늘 페르시아어를 배우기를 원했고, 병사들에게 페르시아인을 데려오면 보상으로서 고기 통조림을 주겠다고 제안해 둔 상태였다. 물자가 귀한 전쟁터에서는 대단한 보상이었다.

수용소에서 만난 코흐는 자신이 페르시아인 '레자 준'이라고 주장하는 질에게 페르시아어를 가르쳐주면 살려주겠다는 제안을 한다. 전쟁의 기간을 2년 정도로 예상하고 매일 네 단어씩 배우면 전쟁이 끝날 무렵 대략 3000개 정도의 단어를 배울 수 있을 것이라고 계산한 것이다. 질은 살기 위해 가짜 페르시아어를 만들어 코흐에게 가르치기 시작한다.

 

이제 위험한 동행이 시작된다. 코흐도, 질을 코흐에게 데려온 나치 병사도 질이 진짜 페르시아인인지 의심한다. 독일군 부대에 페르시아어를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기에 진위를 따지기는 어렵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의심 가는 구석이 보이면 바로 목숨을 잃거나 끔찍한 노역을 견뎌야 하는 상황이다. 질은 코흐에게 하루 네 개씩 가상의 페르시아어 단어를 알려주며 임기응변으로 버텨나간다. 코흐뿐만 아니라 질도 이 모든 걸 기억하고 외워야 한다. 이전 페르시아어 수업내용을 완벽하게 기억해야 의심받지 않고 더 안정적으로 미래를 기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질의 거짓말은 영화 속 긴장감을 구축한다. 전쟁의 공포로부터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모든 것이 게임이라 말했던 아버지 귀도(로베르토 베니니 분)를 연상케 하는 거짓말의 서사이다.

관객은 필사적으로 단어를 만들고 암기하는 질을 보며 그가 거짓말을 들키지 않고 끝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지 가슴을 졸이며 지켜보게 된다. 영화에는 고기 통조림 때문에 참고 있을 뿐 질이 페르시아인이 아니라고 계속 의심하는 독일군 병사가 등장하고, 수용소에 새로 온 페르시아인이 등장한다. 질을 위험에 빠뜨릴 장치가 계속 마련되고 코흐와 병사들의 의심이 시도 때도 없는 시험으로 이어진다.

마침내 질은 벼랑 끝까지 몰려 포기하기 직전에 이른다. 임기응변만으로는 도저히 이 상황을 지속할 수 없겠다는 절망감에 빠진 것이다. 그런 질에게 페르시아어 책에 이은 두 번째 구원이 찾아온다. 조금씩 질을 신뢰하기 시작한 코흐가 그에게 수용소에 수감된 유대인 명단을 정리하는 일을 맡겼기 때문이다. 질은 유대인들의 이름에서 가짜 페르시아어 단어를 만들어낼 규칙을 찾는다. '마르크스(Marx)'라는 이름에서 'M'을 빼고 '아르크스(arx)'라는 단어를 창조하는 식이다. 나치에게 희생된 유대인 명단이 질의 생명을 구하는 아이러니로 이어지는 것이다.

명단을 정리하는 작업은 본래 독일군 여성이 하던 일인데 글씨도 정갈하지 않고 줄을 맞추어 쓰지도 않는 무성의함 때문에 코흐의 심기를 건드린 것이었다. 이 여성은 사무실에서 쫓겨나 급식소에서 일을 하게 되었고, 페르시아인 질을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본다.

코흐와 질의 불안한 동행은 꽤 오랫동안 이어진다. 코흐 역시 유대인일지도 모르는 페르시아인을 끼고돈다는 부대 내 소문 때문에 곤란했던 적이 있는데, 코흐는 페르시아어를 배우고 싶다는 간절함때문에 이를 감내하면서까지 질을 감싼다. 수용소 상황이 변해 질이 다른 곳으로 옮겨 가야 하거나 여러 위기에 처할 때도 코흐가 질을 구해준다.

장교들이 피크닉을 가기로 한 날, 한 사건이 벌어진다. 병사들의 식사를 담당하는 코흐가 식단을 챙기다가 질에게 페르시아어로 '빵'을 무엇이라고 하는지 묻는다. 질은 '라지'라고 대답했다가 폭행을 당한다. '라지'는 이미 나무라고 배웠기 때문이었다. 질은 동음이의어라고 변명했지만, 코흐는 질이 페르시아인이라고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확신하고 수용소에서 운영하는 채석장으로 보낸다. 그곳에서 강도 높은 노동을 견지지 못한 질은 의식을 잃고 계속해서 이상한 말을 중얼거린다. 코흐에 의해 질이 '엄마, 집으로 보내 줘'라는 페르시아어 문장을 중얼거리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고, 질은 페르시아어 수업과 명단을 정리하는 일을 계속하게 된다. 의심으로 얼룩졌던 그들의 관계는 미안함을 느낀 코흐에 의해 일방적인 우정의 형태로 발전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홀로 살아남았다는 질의 죄책감은 더욱 커져간다.

마침내 어느덧 수천 개의 단어를 암기한 코흐가 '페르시아어'로 시를 지어 질에게 들려주는 장면이 등장한다. 질은 더 나아가 이제는 대화 연습이 필요할 때라며 과감하게 가상의 페르시아 단어로 짤막한 대화를 시도한다. 존재하지 않는 언어를 기반으로 한 사람은 꿈과 우정을 키우고, 다른 한 사람은 생명을 연장한다. 질이 죽은 유대인의 명단으로 목숨을 구하는 첫 번째 아이러니에 이은 지독한 역설이다.

스스로 언어를 창조하는 것은 물론, 자신이 만들어 낸 모든 단어를 기억하고 무의식 중에도 가짜 언어로 잠꼬대를 하는 '질'의 모습은 삶에 대한 갈망을 보여주며 깊은 몰입과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코흐는 전쟁에 대한 불만 등 독일어로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가짜 페르시아어로 내뱉으며 질과의 수업을 통해 점차 결여됐던 인간성을 회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의 삶이 거짓 위에서 어디까지 지탱될 수 있는지를 가늠해 보는 건 이 영화를 보는 재미 요소 중 하나다.
코흐는 종전 후 테헤란으로 향하는 입국 심사에서 마침내 진실을 알고 폭발한다.
질은 가짜 페르시아어 단어를 만들면서 기억해 둔 2840개의 이름을 연합군에 알려주며 눈물을 흘린다.

다소 전형적인 구석이 있는 영화임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페르시아어 수업은 간절한 생의 의지에서 비롯된 거대하고 처절한 아이러니를 맛볼 수 있는 영화다.

코흐와 질의 모습은 거짓 위에 구축된 삶을 단순한 선악 이분법으로 재단할 수 없음을 보여주며,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인물을 묘사하지도 않는다. 영화 속에서 독일군은 괴물이 아니라 수줍게 사랑을 고백하거나 짝사랑 상대를 빼앗기자 질투하는 평범한 인간으로도 그려진다. 코흐도 마찬가지다. 시간이 지날수록 코흐는 질에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라며 친밀감을 드러내고 옷과 음식을 주는 친절을 베푼다.

그러나 이들이 저지르는 만행은 인간적인 모습과 대비되어 더욱 끔찍하게 느껴진다. 영화가 코흐를 비롯한 독일군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건 모든 사람이 당연하게 여기고 평범하게 행한 일이 악이 될 수 있다는 개념인 '악의 평범성'이다. 바딤 피얼먼 감독은 "여러 인물의 숨겨진 면모들을 담아내고 싶었다"라고 밝힌다.

"우리는 모두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면서 동시에 끔찍한 증오 행위, 사악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 했다. 절대 선과 절대 악이라는 건 없다. 언제나 그 중간쯤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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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에 보이는 목숨, 육신의 목숨의 구원을 향한 이 애타는 간절함으로 채워진 이야기를 접할 때...
눈에 보이지 않는 목숨, 우리의 영혼의 구원, 하나님이 계신 천국을 향해서는 얼마나 더 애타는 간절함으로 살아야 할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침노'와 '침입'을 말씀하셨는지도 모른다. 천국은 그냥 들어가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1:12)
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누가복음 16:16)
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살아남기 위한 유대인 질의 행동은 천국을 향한 '침노'와 '침입'의 실제를 잘 보여준다.
육신의 구원을 위해서도 이러한데, 영혼의 구원을 위해서는 얼마나 더 필사적으로 애써야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