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가복음 2장 ************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시며 사람들을 가르치시고 많은 사람들이 따르는 가운데 서기관들과의 갈등이 시작된다.
1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A few days later, when Jesus again entered Capernaum, the people heard that he had come home.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1장에서 예수님께 병고침을 받은 사람은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엄한 경고를 따르지 않고(1:43-44),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였고, 이 때문에 예수님은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다(1:45).
"수일 후에"에 헤당하는 '디 해메론'은 특정한 며칠의 기간이 아니라 예수님이 가버나움을 떠나셨다가 돌아오시가까지의 기간을 가리킨다.
"다시"에 해당하는 '팔린'은 마가가 자주 사용하는 단어로서 앞에서 발생한 일과 뒤에 발생한 일을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집"은 예수님이 거하시던 집을 가리키는데, 이는 이미 방문하셨던 베드로의 집(1:29)일 수도 있고, 예수님이 갈릴리 선교의 본거지인 가버나움에 따로 마련하신 집일 수도 있다. 하지만 본문만으로는 알 수가 없다.
원어에는 "소문"에 해당하는 단어가 없다. 직역하면 '그가 집에 계신 것이 들린지라'이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 관한 정보는 이미 사람들에게 큰 관심사가 되어 있었고,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머물지 않으실 때에도 사람들은 사방에서 예수님을 찾아오고 있던 상황이었다(1:45).
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So many gathered that there was no room left, not even outside the door, and he preached the word to them.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개역개정판에서는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로 번역되어 있지만, 개역한글판에서는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로 번역되어 있다. 여기서 '용신'은 '방이나 장소가 비좁아 겨우 무릎이나 움직일 수 있다'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 구절은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모여서 미처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이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몰려들어서 발디딜 틈이 없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1:33의 반복이면서도 예수님을 만나려는 사람들이 그때보다 더욱 늘어났음을 짐작하게 한다.
(마가복음 1:33)
33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도"로 번역된 '톤 로곤'의 원형인 '토 로고스'는 '복음'이란 의미로 빈번히 사용되었으며, 본래는 '말씀'을 가리키는 단어로서 '예언된 말씀', '명령된 말씀', '가르치는 말씀' 등으로 사용되며 또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라는 의미로도 사용되는 단어이다. 따라서 본문에서도 동양사상적인 의미로 지닌 "도"보다는 "복음"이나 "진리", "말씀"이라는 단어가 보다 적절할 것 같다.
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Some men came, bringing to him a paralytic, carried by four of them.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중풍병자"에 해당하는 '파랄뤼티콘'의 원형 '파랄뤼티코스'로부터 중풍병자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 'paralysis'가 나왔다. 이 병은 뇌경색이나 뇌출혈 등으로 인해 몸의 일부분 혹은 전신이 마비되는 증상을 나타낸다. 따라서 본문의 중풍병자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침상에 누운 채로(마태복음 9:2, 누가복음 5:18) 예수님 앞으로 옮겨졌다.
"네 사람"이라는 인원수는 마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다. 이들을 포함하는 "사람들"은 중풍병자의 가족이나 친구들이었을 수도 있도, 종들일 수도 있다. 그들이 누구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움직이지 못하는 중풍병자를 침상 채로 메고 올 만큼 진심으로 중풍병자를 염려하고 그가 치유되기를 바랬던 사람들이다.
4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Since they could not get him to Jesus because of the crowd, they made an opening in the roof above Jesus and, after digging through it, lowered the mat the paralyzed man was lying on.
무리들 때문에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예수님이 계신 집의 문 앞까지도 많은 사람이 모여서 들어설 자리가 없는 상황(2절)이었기 때문이다.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달아 내리니
"그 계신 곳"은 베드로의 집(1:29)일 수도 있고, 예수님이 따로 마련하신 집일 수도 있다.
"뜯어"에 해당하는 '아페스테가산'의 원형 '아포스테가조'는 '지붕의 덮개를 벗기다'라는 정도의 의미이다. 중풍병자가 누운 상을 멘 자들은 모여있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 중풍병자를 예수께로 데려 가기 힘들자 예수님이 거하시는 집의 지붕으로 올라갔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의 가옥은 지붕은 평평하고 외부의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계단을 통해 쉽게 지붕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구조였다.
또한 당시 팔레스틴 지역의 서민들의 집은 돌로 집의 기초를 만들었지만, 지붕은 돌감람나무로 대들보를 만든 후 이를 중심으로 종려나무 가지 등으로 틀을 만들고 잔가지와 짚을 섞은 진흙을 발라 놓은 것이었다. 이런 지붕은 롤러로 편평하게 만들고, 꺼진 곳은 흙으로 메우는 등 수시로 손질을 해야 했다. 지붕은 여름에는 천막을 치고 더위를 피하거나 곡식을 널어 말리는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이러한 구조였으므로 지붕은 벗겨 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붕을 벗겨내는 경우 방 안에 모여있던 사람들 머리 위로 흙 먼지가 쏟아지게 되는데, 그런 상황 속에서 침상을 달아내리기 위해서는 매우 큰 용기와 예수님에 대한 분명한 확신이 필요했을 것이다.
5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When Jesus saw their faith, he said to the paralytic, "Son, your sins are forgiven."
예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
마가복음에 소개되는 기적 관련 기사를 보면 기적이 행해진 후에 사람들이 이를 통해 믿음을 갖게 된 경우보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행위를 통해 기적이 행해진 경우가 더 많다. 이런 경우에 기적을 경험한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나아가는 데에 장벽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치유의 확신과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뚫고 나아갔고, 그 결과 그들은 질병으로부터 치유함을 얻었다. 본문에서는 움직이지 못하는 중풍병자, 집 앞의 많은 사람들이 장벽이었지만, 이 장벽을 확신과 믿음으로 뚫고 나아간 것이다.
"저희의 믿음"에 해당하는 '텐 피스틴 아우톤'은 3인칭 복수 인칭 대명사 '아우톤'이 사용되었으며, 이는 병을 가진 당사자만의 믿음과 함께 그를 예수님께 메고 간 사람들의 믿음을 가리킨다. 이 믿음이 중풍병자의 병을 낫게 한 믿음이다.
"보시고"에 해당하는 '이돈'의 원형 '호라오'는 '(대상을 시각적으로) 관찰하다'라는 의미 뿐만 아니라 '(인지적으로 상대를) 파악하다'라는 의미도 갖는다. 따라서 예수님이 중풍병자와 그를 메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셨다는 것은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행동뿐만 아니라 그 마음속의 믿음까지도 꿰뚫어 보셨다는 의미이다. 예수님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작은 자"에 해당하는 '테크논'은 문자적으로는 '아이, 자녀'를 가리키지만, 은유적으로는 바울이 디모데를 가리킬 경우에 사용하던 바와 같이 '영적인 자녀'를 가리키기도 한다. 히브리적으로는 신적인 존재에 대한 추종자, 영적인 상하 관계에서 따르는 자라는 의미도 갖고 있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에 대한 확신과 믿음으로 나온 중풍병자를 보시고 자신을 따르는 자라는 의미에서 '작은 자'라고 부르셨다고 볼 수 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신 것은 유대인들이 질병의 원인을 죄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유대인들에게 질병에 걸렸다는 사실은 곧 죄를 범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길에서 맹인을 본 제자들이 예수님께 어쭤본 질문을 통해서도 이를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요한복음 9:1-2)
1 예수께서 길을 가실 때에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신지라
2 제자들이 물어 이르되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
또한, 신체에 질병이 있거나 신체가 완전하지 않은 자는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었다.
(레위기 21:16-21)
1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7 아론에게 말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너의 자손 중 대대로 육체에 흠이 있는 자는 그 하나님의 음식을 드리려고 가까이 오지 못할 것이니라
18 누구든지 흠이 있는 자는 가까이 하지 못할지니 곧 맹인이나 다리 저는 자나 코가 불완전한 자나 지체가 더한 자나
19 발 부러진 자나 손 부러진 자나
20 등 굽은 자나 키 못 자란 자나 눈에 백막이 있는 자나 습진이나 버짐이 있는 자나 고환 상한 자나
21 제사장 아론의 자손 중에 흠이 있는 자는 나와 여호와께 화제를 드리지 못할지니 그는 흠이 있은즉 나와서 그의 하나님께 음식을 드리지 못하느니라
즉, '죄가 있음 → 질병 → 장애 →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음'이라는 인생의 순서도가 생겨나는 것이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유대인들의 사고 속에서는 '죄'가 모든 것의 원인인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신다. 중풍병자는 직간접적으로 죄가 원인이 되어 병에 걸렸을 수가 있으며(9절), 무엇보다도 실제로 병으로 인해 거동을 할 수가 없어서 하나님께 나아갈 수도 없는 상태였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었던 근본 원인인 죄에 대해서 '죄 사함'을 선포하신다. 그의 삶의 모든 부족함, 모든 안타까움, 모든 수치와 절망의 근원으로 생각되던 죄에 대해서 '죄 사함'을 선포해 버리신 것이다. 이제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중풍병자의 인생의 순서도는 '죄가 없음 → 치유 → 온전함 →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음'으로 완전히 변하게 된 것이다.
6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Now some teachers of the law were sitting there, thinking to themselves,
어떤 서기관들이 거기 앉아서 마음에 생각하기를
"마음"은 번역과정에서 생략되었지만, 본래 '그들의 마음'을 가리킨다.
"생각하기를"에 해당하는 '디알로기조메노이'의 원형 '디알로기조마이'는 '추론하여 생각하다, 논쟁하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마음에 생각하기를"이라는 구절은 '그들의 마음속에서 궁리하기를'이라는 의미로 번역된다. 서기관들은 각자 자신들이 보고 들은 예수님의 죄사함의 선포에 대해서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생각은 자신들이 배우고 아는 바에 한정되어 있었으며, 예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생각은 할 수 없었다.
7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Why does this fellow talk like that? He's blaspheming! Who can forgive sins but God alone?"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신성모독이로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
이 구절은 당시에 그곳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서기관들의 생각을 알려준다. 그들은 사람의 죄를 사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심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선포하신 예수님에 대해 "신성 모독" 행위를 저질렀다고 생각한 것이다.
율법에 의하면 하나님을 모독하는 "신성 모독" 행위를 저지른 사람은 돌로 쳐서 죽이도록 되어 있었다.
(레위기 24:15-16)
15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그의 하나님을 저주하면 죄를 담당할 것이요
16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돌로 그를 칠 것이니라 거류민이든지 본토인이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죽일지니라
이러한 규례에 따르면 그들은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신성 모독으로 고발하여 끌고 나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경험하고 있는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하고 계시는 분이 누구신지에 대해서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8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Immediately Jesus knew in his spirit that this was what they were thinking in their hearts, and he said to them, "Why are you thinking these things?
그들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줄을 예수께서 곧 중심에 아시고 이르시되
"중심에"에 해당하는 '토 프뉴마티 아우투'라는 표현은 '그의 영으로'라는 의미이다.
"아시고"에 해당하는 '에피그누스'의 원형 '에피기노스코'는 일반적인 의미의 '알다'라는 동사 '기노스코'에 전치사 '에피'가 결합된 것으로서 '정확히 알다', '철저히 알다'라는 강조의 의미를 지닌다.
따라서 "중심에 아시고"는 '그의 영으로 정확히 아셨다'라는 의미이며, 이는 예수님의 신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표현이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사람의 마음을 정확하게 아시기 때문이다.
(열왕기상 8:39)
39 주는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사하시며 각 사람의 마음을 아시오니 그들의 모든 행위대로 행하사 갚으시옵소서 주만 홀로 사람의 마음을 다 아심이니이다
(사무엘상 16:7)
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따라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시다.
(빌립보서 2:6)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생각하느냐
사람의 마음은 생각과 감정의 근원이며, 이를 통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결정하는 것이다. 서기관들의 생각은 서기관들이 어떤 사람들인가를 알려준다.
9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어느 것이 쉽겠느냐
Which is easier: to say to the paralytic, 'Your sins are forgiven,' or to say, 'Get up, take your mat and walk'?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는 말씀은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는 인생을 근본적으로 변화시켜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게 바꾸어 주는 거대한 말이다.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 중에서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는 말씀은 몸의 움직임이 마비되었던 중풍병자가 일어나 자신이 누웠던 침상을 가지고 걸어갈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육신의 질병이 깨끗이 나음을 받는다는 말이다.
어느 것이 쉽겠느냐
서기관들의 생각과 같이 죄사함의 선포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고유 권한이다(7절). 따라서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는 말이 훨씬 더 쉽다. 인간에게는 죄사함의 능력이 주어지지 않았지만, 병을 고치는 능력은 사도들도 보여준 이적이기 때문이다. 본 구절은 예수님께서 단순히 병을 고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사람이 할 수 없는 죄사함을 선포하신 이유가 무엇이겠가를 묻는 질문이다. 그 이유는 10절에 나타난다.
10 그러나 인자가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But that you may know that the Son of Man has authority on earth to forgive sins. . . ." He said to the paralytic,
그러나 인자가
"인자"에 해당하는 '호 휘오스 투 안트로푸'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벤-아담'과 아람어 '바르-에나쉬'가 헬라어로 번역된 것이다. 이는 여러가지 의미를 지닌 호칭이다. '나' 또는 '우리'라는 뜻과 '그'라는 뜻도 있으며, '일반적인 사람'을 가리킬 때와 '선지자'를 가리킬거나 '구름 타고 다시 오시는 통치자'를 가리킬 때도 사용되었다.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 하시고
서기관들을 비롯한 유대인들이 알고있던 바는 사람의 죄를 사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뿐이시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신다. 그렇다면, 이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죄를 사하실 수 있는 분, 곧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땅에서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는 줄을 너희로 알게 하려 하노라"라는 말씀은 예수님 자신이 하늘에서뿐만 아니라 땅에서도 죄를 사하는 권세를 갖고 계신 분, 곧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심을 알려주고자 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예수님께서 병 고치는 '이적'을 행하신 이유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이 메시야임을 깨닫고 예수님 자신에 대한 믿음을 갖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로 인해 서기관을 비롯한 유대인의 권력층과는 갈등이 발생한다.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시되
예수님께서는 이미 중풍병자에게 "작은 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신 바 있다(5절).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이심을 알려주심과 함께 중풍병자가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해 주셨다. 즉, 그를 받아주신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신다.
11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I tell you, get up, take your mat and go home."
내가 네게 이르노니
"내가 네게 이르노니"에 해당하는 '소이 레고'는 '너에게 내가 말한다'이다. 이는 말하는 사람의 권위를 강조하는 표현이며, 예수님 자신이 신적인 권위와 능력의 출처였으므로 이와 같이 말씀하실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말씀은 즉각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12절).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중풍병자에게 명령하신 것은 ①일어나는 것 ②상을 가지는 것 ③가는 것이었다.
①일어나는 것은 중풍병자의 병을 고치시는 직접적인 명령이었다.
②상을 가지는 것은 몸이 마비된 채로 병상에 누워 있던 중풍병자가 자신이 누워있던 병상을 거두는 것이며, 이는 완치를 의미한다.
③가는 것은 정상적인 일상으로의 복귀,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정상적인 삶으로의 복귀를 의미한다.
이 명령들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신적 권능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상"에 해당하는 '크라밧톤'의 원형 '크라밧토스'는 짚을 채워 넣어서 만든 요나 거적, 매트리스 등을 가리킨다. 이는 중풍병자가 가난한 사람들이 사용하던 작은 침대나 야영용 침대에 눕혀져서 예수님께 나아왔음을 보여준다.
12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그들이 다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He got up, took his mat and walked out in full view of them all. This amazed everyone and they praised God, saying, "We have never seen anything like this!"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11절)"는 말씀대로 그가 곧 일어나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집을 향해 나갔다.
"곧"은 예수님이 말씀하시자 즉각적으로 이 일이 일어났음을 의미하는 동시에, 일어난 사람이 사람이 즉시 상을 거둘만큼 완치되었음을 의미한다.
그들이 다 놀라
한글개역 성경은 '그러자'라는 뜻을 지닌, 앞선 어떤 일에 대한 결과를 나타내는 접속사 '호스테'를 번역하지 않았다. 본문을 직역하면 '그러자 그들이 모두 놀랐다'이다. 이는 모여있던 사람들이 예수님이 중풍병자에게 말씀하실 때에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중풍병자가 실제로 일어나 상을 가지고 걸어가는 것을 보고 놀랐음을 의미한다.
"놀라"에 해당하는 '엑시스타스다이'의 원형 '엑시스테미'는 '어떤 곳에서 무엇을 제거하다'라는 의미를 갖는 타동사지만, 비유적으로 사용되는 경우에는 '놀라다', '이상하게 여기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또한 자동사로 사용되는 경우에는 의미가 더 심화되어 '정신이 나가다', '정신을 잃다'라는 의미를 가지며, 여기서는 이와 같이 사용되었다. 일반적으로 '놀라다'라는 뜻을 나타내는 데에는 '담베오'를 사용하지만, 여기서는 '정신을 잃을 정도로 놀라다'라는 의미의 '엑시스테미'를 사용하여 사람들이 중풍병자에게 일어난 치유에 대해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가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는 모인 사람들이 두려워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마태복음 9:8)
8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누가복음 5:26)
26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
이 표현들은 모두 다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느낀 놀라움과 두려움이 대단한 것이었음을 보여 준다.
"다"에 해당하는 '판타스'는 이런 놀람을 한두 사람만이 느낀 것이 아니고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낀 것임을 나타낸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이르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 하더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라는 기록은 예수님의 치유 사건을 지켜본 모든 사람들이 보인 반응이며, 동시에 중풍병자를 고치신 기적의 결론이기도 하다.
(마태복음 9:8)
8 무리가 보고 두려워하며 이런 권능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누가복음 5:26)
26 모든 사람이 놀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오늘 우리가 놀라운 일을 보았다 하니라
대개의 경우 예수님의 기적을 본 사람들은 놀라는 데 그치지만, 여기에서는 독특하게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는 사람들이 이전에는 본 적이 없는 예수님의 치유와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강하게 느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게 하는 일은 예수님의 사역이기도 했다.
(요한복음 17:4, 6)
4 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
6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
예수님은 단순히 치유의 기적만을 베푸는 사람으로 알려지는 것을 피하셨다. 만일 일반적인 사람들처럼 그것을 원하셨다면, 광야에서의 40일간의 금식 기도 후에 사탄의 시험을 이기지 못하셨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이기신 분이다. 여기서는 중풍병자를 치유하시면서 죄사함의 권세가 있음을 보여 주셨다. 모여있던 사람들은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으며, 눈 앞의 기적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깨닫고 인정한 것이다.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도 삶을 바꾸시는 예수님, 죄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예수님,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예수님, 하나님 앞에 나아갈 자격을 갖게 하시는 예수님 앞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13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once again Jesus went out beside the lake. A large crowd came to him, and he began to teach them.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다시"에 해당하는 '팔린'은 마가가 자주 사용하는 단어로서 앞에서 발생한 일과 뒤에 발생한 일을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1절에서도 이와 같은 역할로서 사용되었다. 여기서 "다시"라는 부사는 본문 말씀을 예수님께서 전에 갈릴리 바닷가에서 일하고 있던 시몬과 안드레, 그리고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셨던 일과 연결시켜 준다.
(마가복음 1:16)
16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예수님께서는 바닷가에 나가서 사람들을 가르치신 일은 여러번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바닷가가 배경으로 자주 등장하는 것은 갈릴리 지역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바다를 생업의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회당에서만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삶의 현장에서도 이루어졌다.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예수님은 가르치는 일을 사역의 큰 부분으로 삼으셨으며, 회당, 바닷가, 산, 길 등 장소를 가리지 않고 가르치셨다.
"가르치시니라"에 해당하는 '에디다스켄'이 과거 행동의 계속이나 반복을 나타내는 미완료 과거형이라는 점은 예수님이 가 르치는 사역을 끊임없이 계속하셨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As he walked along, he saw Levi son of Alphaeus sitting at the tax collector's booth. "Follow me," Jesus told him, and Levi got up and followed him.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레위"는 본명이고, '마태'는 예수님을 만난 후에 예수님께로부터 받은 또 다른 이름으로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이다. 마가는 여기서만 "레위"라는 본명으로 기록하였으며, 12제자의 이름을 언급할 때에는 '마태'로 기록하였다. 이는 "레위"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후에는 주로 '마태'로 불렸기 때문일 것이다.
"세관"에 해당하는 '텔로니온'은 운임이나 통행료를 받는 작은 건물, 세금을 받는 징수원이 거하는 조그만 사무실이나 징수 창구를 가리킨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라는 표현은 레위가 세리였음을 나타낸다. 세리들은 이스라엘을 강제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로마와 이스라엘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으므로 민족의 반역자로 여겨졌고, 로마의 감독자들이 요구하는 액수보다 훨씬 많은 세금을 가난한 유대인들로부터 착취해 자신들의 재산을 불려가는 악한 행위들을 일삼았기 때문에 유대인들 사이에서 멸시를 받고 있었으며, 탐욕적이고 이기적인 인물로 인식되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종교적으로도 배척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들이 이방의 돈을 취급하고 이방인들과 관련된 일을 함으로써 유대인의 율법에 명시된 정결 규례들을 무시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유대인들의 시각에서 볼 때, 예수님께서 세리인 마태를 제자로 부르신 일은 사실은 지극히 불경건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 마태를 부르신 일은 예수님께서 세상 모든 사람을 부르러 오셨음을 나타낸다.
(마가복음 16:15)
15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나를 따르라"는 한 마디 말씀만으로 예수님은 레위를 부르셨다.
"일어나 따르니라"는 레위가 예수님의 말씀에 즉각 순종하였음을 나타낸다. 이는 시몬과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실 때와 흡사하다.
(마가복음 1:16-20)
16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8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19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마태는 시몬과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처럼 그동안 살아오면서 자신에게 중요했던 것들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
누가복음은 마태가 그의 삶에서 소중하게 여겼던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누가복음 5:29)
27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28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마태의 모습은 같은 민족인 유대인들로부터 멸시를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으로도 배척받고 있던 자신을 불러주신 예수님의 부르심에 대한 감사와 복종의 모습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즉각적인 순종은 예수님의 부르심이 신적인 권위를 지니고 있었음을 나타내며, 제자들의 순종도 주저없이, 지체없이 모든 것을 포기하고 따르는 전인적인 순종이었음을 나타낸다.
14절의 내용은 마태가 기록한 마태복음과 거의 동일한 것으로 볼 때, 이 구절은 마태의 증언을 토대로 기록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마태복음 9:9)
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5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While Jesus was having dinner at Levi's house, many tax collectors and "sinners" were eating with him and his disciples, for there were many who followed him.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그의 집"은 레위(마태)의 집이다. 레위가 예수님의 제자로 부름받은 사실에 감사하여 예수님을 위해서 자신의 집에서 잔치를 벌인 것이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을 통해 이를 알 수 있다.
(마태복음 9:10)
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누가복음 5:29)
29 레위가 예수를 위하여 자기 집에서 큰 잔치를 하니 세리와 다른 사람이 많이 함께 앉아 있는지라
"앉아 잡수실"에 해당하는 '카타케이스다이'의 원형 '카타케이마이'는 본래 '기대어 눕다'라는 의미이다. 예수님을 비롯하여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은 당시 로마의 식사 풍습에 따라서 침상에 비스듬히 누워서 식사을 했다.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많은 세리와 죄인들"은 레위가 식사에 초대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세리였던 레위는 큰 부자였을 것이므로 많은 음식을 차리고 많은 사람들을 초대했을 것이다. 초대된 사람들을 마태의 교우 범위 내에 있던 사람들이었으므로 그들은 세리와 죄인들이었을 것이다.
"죄인들"에 해당하는 '하마르톨로이'는 당시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세분화하여 규정한 율법 규례와 유전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일반적인 용어였다.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처럼 외적 경건을 생명처럼 중요하게 여겼던 자들은 율법 규례와 유전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죄인이라 부르며 매우 경멸하였으며, 이러한 죄인들과 어울리거나 식사하는 것조차 치욕으로 여겼다.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그러한 사람들"은 많은 세리와 죄인들을 가리킨다.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는 예수님께서 율법을 따라 죄인들로 불리는 사람들을 경멸치 않으시고 그들과 함께 어울려 식사하심으로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고, 그들은 예수님을 인정하고 가르침에 귀를 기울였음을 나타낸다. 예수님은 그들도 하나님의 자녀이며 구원받아야 할 자들이었고, 재물은 많이 소유했을지 몰라도 실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었음을 알고 계셨던 것이다. 이들을 불러 회개시키는 것이 예수님의 사역이었고 이는 17절에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다.
(누가복음 15:7)
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1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When the teachers of the law who were Pharisees saw him eating with the "sinners" and tax collectors, they asked his disciples: "Why does he eat with tax collectors and 'sinners'?"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바리새인"은 '분리'라는 뜻의 히브리어 '파라쉬'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분리주의자'라는 의미이다. 이들은 B.C. 167년 무렵에 헬레니즘의 유입과 이교주의의 준동을 막고 율법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해서 시작된 종교 분파의 하나로서 제사장 맛다디아 및 그의 아들들과 함께 투쟁했던 하시딤(Hasidim)의 후예들이라고 볼 수 있다. 이들은 처음에는 주로 평민 계층으로서 율법과 전통을 중요시하는 경건한 무리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경건과 세속으로부터의 분리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일반 백성들에게 공감과 존경은 얻어냈지만 '비천한 민중(암 하아레츠)'을 경멸하는 우를 범했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에 이르러서는 외적인 형식이나 구전, 또는 율법의 문자적인 적용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하나님에 대한 진실한 신앙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외식적 신앙에 몰두하여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복음 전파 사역을 끈질기게 방해하였고, 결국에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히게 하는 주동 집단이 되고 말았다. 여기에서도 그들은 자신들이 설정한 기준에 어긋나는 예수님의 행동에 대하여 받아들이지 못하고 반발하고 있다.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와 관련하여 일부 사본들(알렉산드리아 사본과 에프레미 사본)에는 '카이 호이 파리사이오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다른 사본들(시내산 사본과 레기우스 사본)에는 '톤 파리사이온'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는 '바리새인들의 서기관들', 즉 '바리새파에 속한 서기관들'이라는 의미가 된다. 동일한 사건을 기록한 누가복음에는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누가복음 5:30)
30 바리새인과 그들의 서기관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이르되 너희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과 함께 먹고 마시느냐
따라서 예수님을 비방한 자들은 '바리새인들'과 '바리새파에 속한 서기관들'의 두 그룹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서기관들이 앞장서서 예수님을 비방했고, 바리새인들이 이들을 따랐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어찌하여"에 해당하는 '티'가 기록되지 않은 사본도 있지만, 한글 성경은 본문이 의문문이므로 '어찌하여'를 포함시켰다. 번역본 중에는 표준원문을 따라 '어찌하여 그는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가?'라고 번역한 경우도 있다.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는 민족의 반역자라 할 수 있는 세리들, 율법을 지키지 않을 뿐만 아니라 알지도 못하는 죄인들과 함께 어울려 식사를 하는 예수님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못하는 바리새인들의 관점이 나타나 있다. 당시에는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 즉 식탁 교제는 함께 모인 사람들과의 인격적 교제를 의미했기 때문이었고,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알지 못하는 자들을 저주 받은 자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7:49)
47 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48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
49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근본적으로 바리새인들은 남을 멸시하면서 자신들만이 의롭다고 생각하는 교만한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편협하고 교만한 바리새인들의 반발을 예상하셨지만, 이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분명한 목적을 갖고 계셨다. 그것이 다음절에 기록되어 있다.
17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on hearing this, Jesus said to them, "It is not the healthy who need a doctor, but the sick. I have not come to call the righteous, but sinners."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본절은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제기한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변인 동시에 더 나아가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과 이를 위한 사역을 알려 주는 말씀이다.
"건강한 자"는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을 가리키는 은유적 표현이다. 그들은 스스로 의롭다고 자부하는 사람들, 곧 의인들이다. 그러나 진정한 건강이라기보다는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일 뿐이다.
"의사"는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은유적 표현이다. 예수님은 죄에 빠진 영혼을 구원하시고 치유하시는 분이시다.
"병든 자"는 죄인들을 가리키는 은유적 표현이다. 자신의 죄를 알고 구원을 바라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 표현 속에는 예수님이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명쾌하게 주어져 있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다"라는 표현은 당시에 이스라엘에 널리 퍼져있던 속담으로 생각되며,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익숙한 속담을 사용하여 바리새인들의 교만과 허위 의식을 지적하신 것이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의인"은 진정한 의미에서 의로운 사람이 아니고 스스로가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가리키며, "건강한 자"와 동일한 개념이다.
(로마서 3:10)
10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죄인"은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 의인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의인이 아닌 사람, 곧 스스로의 죄를 인식하고 스스로가 죄인임을 인정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병든 자"와 동일한 개념이다. 그러한 사람들만이 예수님을 받아들일 수 있다.
"부르러"에 해당하는 '칼레사이'의 원형 '칼레오'는 구원으로의 초청이나 제자로의 부름에 사용되었다. 본 구절에는 이 단어가 두 번 나타나지만, 원어 성경에는 한 번만 사용되어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동사 하나에 두 개의 목적어가 사용되어 강한 대조를 이루면서 최종적으로는 '죄인'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인 것이다.
18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Now John's disciples and the Pharisees were fasting. Some people came and asked Jesus, "How is it that John's disciples and the disciples of the Pharisees are fasting, but yours are not?"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하고 있는지라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일부 사본에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로 나타나 있다. 이는 이어지는 구절과도 일치하며, 누가복음과도 일치한다.
(누가복음 5:33)
33 그들이 예수께 말하되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
그러나 ' 바리새인의 제자들'과 관련해서는 바리새인들은 교사가 아니었는데 과연 제자가 있었는가라는 의문이 제기된다. 그래서 '바리새인의 제자들'이란 바리새파의 서기관들을 가리킨다는 견해가 있고, 서기관 계열에 속한 바리새인들은 약간의 제자를 두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견해도 있으며, 바리새인들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을 가리킨다는 견해도 있다. 따라서 이는 ①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 ②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파에 속한 서기관들, ③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 ④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교훈을 따르는 자들 등으로 볼 수가 있다.
"금식"에 관한 규정들은 시대에 따라 약간씩 변했다. 이스라엘 역사 초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속죄일에만 금식을 했다.
(레위기 16:29)
29 너희는 영원히 이 규례를 지킬지니라 일곱째 달 곧 그 달 십일에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말되 본토인이든지 너희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이든지 그리하라
바벨론 포로 이후에는 일 년에 네 번씩 금식을 했다.
(스가랴 8:19).
19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넷째 달의 금식과 다섯째 달의 금식과 일곱째 달의 금식과 열째 달의 금식이 변하여 유다 족속에게 기쁨과 즐거움과 희락의 절기들이 되리니 오직 너희는 진리와 화평을 사랑할지니라
이처럼 온 백성이 참여하는 공식적인 금식 외에도 개인적으로나 특별한 일을 당할 때 하루 또는 일주일 혹은 세 주 또는 40일간 행했던 다양한 금식의 사례들이 있다. 그러다가 예수님 당시에는 매주 두 번씩 금식을 행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바리새인들은 모세가 율법을 받으려고 시내산에 올라갔던 날과 내려왔던 날이라고 여겨지던 일주일의 둘째 날과 다섯째 날을 기념하기 위해 월요일과 목요일을 금식의 날로 정했다.
(누가복음 18:12)
1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또한 금식의 성격도 변했다. 구약 시대에는 금식이 슬픔과 회개의 표시였지만, 신약 시대에는 경건과 헌신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외식하는 사람들에게 금식할 때 얼굴을 흉하게 하고 일부러 슬픈 기색을 하면서 자기 신앙을 과시하지 말 것을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6:16)
16 금식할 때에 너희는 외식하는 자들과 같이 슬픈 기색을 보이지 말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에게 보이려고 얼굴을 흉하게 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17 너는 금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으라
사람들이 예수께 와서 말하되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요한의 제자들"이 금식을 한 이유는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세례 요한이 감옥에 갇혀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그의 제자들이 그를 위해서 금식하며 기도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여기서는 질문을 한 사람들을 단순히 "사람들이"라고 기록하고 있지만, 동일한 사건을 기록한 마태복음 9:14에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질문했음이 기록되어 있다.
(마태복음 9:14)
14 그 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우리와 바리새인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즉, 그들은 자신들의 스승을 위해서 슬퍼하면서 금식을 하고 있었으며, 자신들과 달리 금식하지 않는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해 불만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둘째, 세례 요한의 제자들 역시 바리새인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의 경건을 보여주기 위해 금식을 하고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금욕주의자들이었다는 기록으로부터 이를 짐작할 수 있으며, 그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경건하게 행동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일 수 있다.
(마태복음 11:18-19)
18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19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19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Jesus answered, "How can the guests of the bridegroom fast while he is with them? They cannot, so long as they have him with them.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혼인 집"은 성경에서 '천국'을 비유하는 데에 사용되었으며, 예수님과 성도의 관계는 신랑과 신부의 관계에 비유되었다. 최종적으로 천국에서 혼인잔치가 열릴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에서 혼인은 가장 기쁜 일 중에 하나였기 때문에 축하연이 한 주 동안이나 계속되기도 했고 혼인식 을 전후로 해서는 율법이 명하는 금식과 같은 의무를 면제 받을 수도 있었다고 한다.
"신랑"은 혼인잔치의 주인공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손님들"에 해당하는 '휘오이'는 '아들'이라는 뜻을 가진 '휘오스'의 복수형이다. 이 단어는 '자녀들', '참석자들', '친구들' 등으로 번역되었다. 이들은 혼인 집에서 신랑과 함께 기뻐하는 자들로서 구원받은 성도들로 이해할 수 있다.
본 구절에서 예수님은 어찌하여 제자들이 금식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시고, 금식해야 하는 슬픔의 때가 언제인지를 말씀하고 계신다. 그것은 앞으로 다가올 그리스도의 수난의 때와 그 이후에 예수님을 직접 대면하여 볼 수 없게 되는 때이다. 그 이전에는 이 땅에 오신 예수님과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하는 때인 것이다.
20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But the time will come when the bridegroom will be taken from them, and on that day they will fast.
그러나 신랑을 빼앗길 날이 이르리니 그 날에는 금식할 것이니라
"신랑을 빼앗길 날"은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의 날을 가리킨다. 예수님은 말씀하신 대로 모든 인류의 구속을 위해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여기서 '날'은 두 번 언급되고 있는데, 먼저 나오는 "(신랑을) 빼앗길 날"의 '날'에 해당하는 '헤메라이'는 복수형이고 그 다음에 나오는 "(금식할) 그 날"의 '날'에 해당하는 '헤메라'는 단수형으로서 수가 일치하지 않고 있다. "빼앗길 날'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시기까지의 사흘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으며, 혹은 예수님이 잡히신 날과 십자가에 못박히신 날을 가리킨다고 보기도 한다. 예수께서 고난당하신 목요일과 금요일, 그리고 그 이후의 모든 목요일과 금요일을 가리킨다는 주장도 있다.
21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No one sews a patch of unshrunk cloth on an old garment. If he does, the new piece will pull away from the old, making the tear worse.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 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느니라
"생베 조각"에 해당하는 '에피블레마 라쿠스 아그나푸'의 문자적인 뜻은 '새 천 조각'이고, 이는 '세탁을 한 적이 없어서 줄지 않은 옷감'을 의미한다. 이 비유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시작된 새로운 복음의 질서를 가리킨다.
"낡은 옷"은 하나님이 주신 율법을 인간적으로 해석하여 형식적, 문자적, 기계적으로 준수하는 데에 얽매이는 구질서와 낡은 가르침을 가리킨다. 새 천 조각으로 낡은 옷을 기우면 옷을 입고 활동하는 동안 변형되는 과정에서 튼튼한 새 천 조각이 낡은 옷을 당겨서 낡은 옷이 해어지고 더 낡아버린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새 천 조각으로 낡은 옷을 기우면 옷을 세탁할 때 아직 줄어들지 않았던 생베 조각이 물을 흡수하여 급격히 줄어들면서 낡은 옷에 주름을 만들거나 옷 전체를 망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어느 경우든지 그 속 뜻은 그리스도의 새로운 복음과 유대교의 율법주의 전통은 함께 조화될 수 없으며, 어느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망칠 수 밖에 없는 상충적 관계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 관계는 상호 파괴적인 관계가 아니며, 상호 보완적인 관계이다. 예수님의 새로운 복음의 가르침은 과거의 가르침을 파괴하고 폐지하는 것이 아니라 형식에 매몰된 과거의 가르침의 근본 정신을 밝히고 이를 기계적인 준수로부터 삶을 역동적으로 바꾸는 삶의 기르침으로 변화시킴으로써 과거의 가르침을 새로운 가르침으로 온전하게 만드셨다. 대표적으로 안식일에 대한 가르침이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통해서 이를 알 수 있다. 마태복음 5:17은 이 의미를 기록하고 있다.
(마태복음 5:17)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예수님은 바리새인이나 세례 요한의 제자들이 행하던 형식적인 금식과 같은 과거의 가르침에 종속될 필요가 없으셨다. 그리고 본문의 비유를 통해서 구시대의 전통에 얽매인 금식의 문제를 가지고 하늘 나라의 신랑을 맞이한 기쁨으로 온전한 복음의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판단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22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And no one pours new wine into old wineskins. If he does, the wine will burst the skins, and both the wine and the wineskins will be ruined. No, he pours new wine into new wineskins."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새 포도주"의 "새"에 해당하는 '네온'의 원형 ' 네오스'는 시간적으로 새롭다는 의미이다.
"새 부대"의 "새"에 해당하는 '카이누스'의 원형 '카이노스'는 본질적으로 새롭다는 의미이다. 이 단어는 예수님이 가버나움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시고 귀신들린 자를 고치셨을 때 그 곳에 있던 사람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해서 '권위 있는 새 교훈'이라고 말했을 때의 '새'에 해당하는 단어의 원형과 같다.
(마가복음 1:27)
27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새 포도주가 낡은 부대를 터뜨"리는 이유는 새 포도주가 아직 발효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발효가 시작되어 부피가 늘어나면 유연하고 신축성이 있는 새 가죽 부대와 달리 낡고 뻣뻣한 낡은 가죽 부대가 견디지 못하고 터지기 때문이다. 이는 왕성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낡은 가죽 부대 같은 바리새인들의 형식과 전통이 수용하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앞에서 언급된 혼인잔치의 비유를 통해서 보자면,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에게는 낡은 가죽 부대와 같은 바리새인들의 형식적인 금식은 합당하지 않으며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도래한 하나님 나라를 맞이하는 기쁨의 혼인 잔치가 합당한 것이다.
과거의 전통과 형식에 얽매인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종교 관습을 기준으로 금식의 문제를 판단하여 예수님을 비난하려 했다.이에 대해 예수님는 '혼인 집 비유 (19-20절)', '생베 조각 비유 (21절)', '새 포도주와 낡은 부대 비유 (22절)'를 통해, 그들이 질문에 대한 답변에 국한하지 않으시고 모든 율법을 새롭게 완성하신 예수님 자신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의 새로운 복음이 이미 도래했음을 가르쳐 주셨다.
23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그의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one Sabbath Jesus was going through the grainfields, and as his disciples walked along, they began to pick some heads of grain.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안식일에" 이루어진 일이다. 이로 인해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이 촉발된다.
"밀밭"에 해당하는 '스포리몬'은 단지 밀밭 뿐만 아니라 여러 곡식들을 재배하는 일반적인 밭을 가리키는 복수형이다. 일부 영역본은 '옥수수 밭'이나 '곡식 밭'으로 번역하기도 했다.
"사이로"에 해당하는 '디아'는 '관통하여'라는 의미의 전치사이므로 예수님 일행은 밭들, 즉 밀밭과 밀밭 사이로 난 좁은 길을 통과하여 가신 것으로 볼 수 있다.
그의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자르니
"열며"에 해당하는 '포이에인'의 원형 '포이에오'는 단순히 '(길을) 가다'라는 뜻이기도 하지만 '(길을) 만들다'라는 의미도 갖는다. "지나가실새"와 "이삭을 자르니"라는 묘사를 볼 때 예수님이 지나가실 수 있도록 제자들이 추수기에 이른 곡식들을 잘라 길을 만든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같은 내용을 기록한 마태복음 12:1을 보면 제자들이 이삭을 자른 행위는 단지 지나가기 위해서만이 아니고 먹기 위한 목적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마태복음 12:1)
1 그 때에 예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로 가실새 제자들이 시장하여 이삭을 잘라 먹으니
따라서 이 상황은 예수님과 제자 일행이 지나가기 위한 목적과 더불어 시장기를 면하기 위해 밀밭 사이를 가로질러 가면서 진행 방향에 놓여 있는 이삭을 잘라먹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상황에 대한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의 기록을 비교할 때, 마가는 지금의 상황을 "길을 열며"로 기록하여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열심히 일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부각시켰고, 마태는 "이삭을 잘라 먹으니"로 기록하여 앞으로 안식일 및 먹는 것과 관계된 율법 논쟁이 이어질 것임을 부각시켰다. 이처럼 각 복음서의 저자들은 사실과 배치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자신이 부각시키려는 신학 주제에 따라 약간씩 묘사를 달리했다.
'이삭을 잘라 먹는 행위'와 관련된 구약의 율법은 신명기 23:25를 참조할 수 있다.
(신명기 23:25)
25 네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때에는 네가 손으로 그 이삭을 따도 되느니라 그러나 네 이웃의 곡식밭에 낫을 대지는 말지니라
다른 사람의 밭에 들어가서 곡식을 따서 먹는 행위는 절도행위에 속하지 않았고 가난한 자의 굶주림을 채워주기 위해서 권리로서 보장된 일이었다. 그러나 곡식을 그 자리에서 먹지 않고 베어서 나오는 일은 금지되어 있었다. 따라서 지금의 상황에 대해서 율법적으로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밭에 들어가서 곡식을 먹은 일이 아니고, 이 일이 안식일에 행해졌다는 사실이다.
24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The Pharisees said to him, "Look, why are they doing what is unlawful on the Sabbath?"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말하되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예수께 말하되"는 바리새인들이 안식일 규례를 준수하지 않고 이삭을 자른 책임을 예수님께 따지고 있는 상황임을 나타낸다. 이는 제자들의 행동이었으나, 당시 어떤 집단이 잘못하면 그 집단의 대표자에게 책임을 묻는 관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보시오"에 해당하는 '이데'는 바리새인들이 매우 정색하면서 예수님께 대하여 거칠게 항의를 하고 있는 상황을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그들은 드디어 꼬투리를 잡았다는 듯이 흥분하여 "보시오"라고 외쳤던 것이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은 제자들이 모세 율법을 따르지 않았다는 비난이다. 모세 율법은 파종이나 추수 기간에도 안식일을 지킬 것을 명한다.
(출애굽기 34:21)
21 너는 엿새 동안 일하고 일곱째 날에는 쉴지니 밭 갈 때에나 거둘 때에도 쉴지며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바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는 계명에 의거한 것이다.
(출애굽기 20:8)
8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가장 중요한 것은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모세 율법을 자신들이 해석하고 자신들이 세분화하여 안식일에는 39가지 노동을 하지 못하도록 규정(할라카)을 만들었다. 이 규정에 의하면 손으로 이삭을 자르는 행위는 추수 금지 규정을 위반한 것이고, 손으로 비빈 행위는 타작 금지 규정을 위반한 것이며, 이삭 껍데기를 입으로 부는 행위는 키질 금지 규정을 위반한 것으로 간주되었 다. 이처럼 사람들이 만들어 전해진 유전을 절대 진리로 생각하고 이를 고수했던 바리새인들은 제자들의 행위를 안식일 규정을 위반한 것으로 판단했으며, 나아가 예수님을 비난하고 트집을 잡을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유전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율법을 자신들이 가공하여 사람들을 자신들의 영향력 안에 가두어 두고자 하는 것이었다.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He answered, "Have you never read what David did when he and his companions were hungry and in need?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다윗이" 예수님은 제자들이 안식일 규례를 범했다며 정죄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다윗의 사례를 들어 반문하신다. 예수님이 다윗을 예로 든 이유는 유대인들이 다윗을 가장 이상적인 왕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다윗에 대해서는 그들이 반박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야말로 다윗보다 더 큰 진정한 유대의 왕이라는 사실을 암시하시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먹을 것이 없어"에 해당하는 '크레이안 에스켄'은 '그가 필요로 했다'는 의미이다. '크레이안'의 원형 '크레이아'는 어떤 것을 긴급히 필요로 하며 충당해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는 다윗이 시장하여 먹을 것을 간절히 원했음을 나타낸다.
26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In the days of Abiathar the high priest, he entered the house of God and ate the consecrated bread, which is lawful only for priests to eat. And he also gave some to his companions."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25절에 언급된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 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은 사무엘상 21:1-6에 기록되어 있으며, 이 사건 당시의 제사장의 이름은 아히멜렉이었다.
(사무엘상 21:1)
1 다윗이 놉에 가서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이르니 아히멜렉이 떨며 다윗을 영접하여 그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네가 홀로 있고 함께 하는 자가 아무도 없느냐 하니
아히멜렉이라는 이름은 '왕의 형제'라는 뜻이며, 아비아달이라는 이름은 '생존한 아버지'라는 뜻이다. 아비아달은 아히멜렉의 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마가가 아비아달로 기록한 이유에 대해서는 몇가지 주장들이 있다. ①기록과정에서 발생한 저자의 착오, ②아버지인 아히멜렉보다 아들 아비아달이 더 유명했기 때문, ③부자를 같은 이름으로 불렀던 당시의 풍습, ④아버지와 아들이 제사장의 책무를 함께 수행했기 때문 등으로 볼 수 있다. 이 가운데 ③, ④의 주장이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즉, 다윗 당시에 아히멜렉과 그의 아들 아비아달이 함께 제사장으로서 의 직무를 행했었고, 다윗이 진설병을 먹었을 당시의 주 제사장은 아히멜렉이었지만 다윗의 재위 시절 동안의 실질적인 제사장은 아비아달이었으므로 마가가 의도적으로 다윗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아비아달의 이름을 기록했다는 견해이다. 이러한 견해 외에도 구약 자체가 두 사람의 이름을 혼용하고 있기도 하다.
(사무엘하 8:17)
17 아히둡의 아들 사독과 아비아달의 아들 아히멜렉은 제사장이 되고 스라야는 서기관이 되고
따라서 이러한 마가의 기록은 이상하지 않다.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전"에 해당하는 '톤 오이콘 투 데우'를 직역하면 '하나님의 집'이다. '오이콘'의 원형 '오이코스'는 사람이 거주하는 '집'을 의미한다. '성전'에 해당하는 단어는 '나오스', '히에론' 등이 있지만, '집'을 의미하는 '오이코스'를 사용한 까닭은 다윗 당시에는 성전이 건축되지 않은 상태였고, 하나님의 언약궤가 예루살렘 근처의 놉에 있던 성막에 이었기 때문이다. 이 성막은 동물의 가죽으로 뒤덮인 이동식 장막에 이었다. 예수님은 지금 다윗 시대의 성소를 말씀하고 있으므로 웅장한 형태로 건축된 성전이 아니라 '집'을 의미하는 단어를 사용한 것이다.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다윗이 성막에서 율법이 금한 진설병을 먹을 수 있었다면, 더 큰 왕이며 메시야이신 예수님이 안식일에 인간의 규례가 금한 일을 행하는 것은 아무 거리낄 것이 없는 행위이다. 동일한 사건을 기록한 마태복음 12:6에는 예수님이 자신을 가리켜 "성전보다 더 큰 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이 율법에 제한을 받지 않음을 분명히 밝히셨고, 자신과 제자들의 무죄함을 증거하셨음이 기록되어 있다.
(마태복음 12:6)
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성전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느니라
"진설병"에 해당하는 '아르투스 테스 프로데세오스'에서 '아르투스'는 '밀가루를 반죽하여 구운 떡'을 의미하는 명사 '아르토스'의 목적격 복수형이며, '진설'로 번역된 '프로데세오스'의 원형 '프로데시스'는 '~의 앞에'를 의미하 는 전치사 '프로'와 '~을 배치하다’는 의미를 지닌 동사 '티데미'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앞에 내어 놓음', '진열함'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본문을 직역하면 '앞에 진열해 놓은 떡들을'이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떡은 복수로 쓰였는데, 이는 구약 시대에 하나님의 성소에 진열해 놓은 떡은 이스라엘의 12지파를 상징하는 12개였기 때문이다.
(레위기 24:5-6)
5 너는 고운 가루를 가져다가 떡 열두 개를 굽되 각 덩이를 십분의 이 에바로 하여
6 여호와 앞 순결한 상 위에 두 줄로 한 줄에 여섯씩 진설하고
제사장은 매 안식일마다 진설병을 교체해야 했고, 교체되어 나온 진설병은 아론 계열의 제사장만 먹을 수 있었다.
(레위기 24:8-9)
8 안식일마다 이 떡을 여호와 앞에 항상 진설할지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것이요 영원한 언약이니라
9 이 떡은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 돌리고 그들은 그것을 거룩한 곳에서 먹을지니 이는 여호와의 화제 중 그에게 돌리는 것으로서 지극히 거룩함이니라 이는 영원한 규례니라
27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Then he said to them, "The Sabbath was made for man, not man for the Sabbath.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다음 절인 28절은 본 사건을 기록한 마태복음 12:1-8과 누가복음 6:1-5에도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본 절은 마가복음에만 기록된 내용이다.
(마태복음 12:7-8)
7 나는 자비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을 너희가 알았더라면 무죄한 자를 정죄하지 아니하였으리라
8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6:5)
5 또 이르시되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하시더라
이 때문에 본절의 내용이 마가에 의해서 추가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으나, 안식일에 관한 가르침을 인위적으로 추가할 수는 없다. 그것은 인위적인 규정을 만든 바리새인들과 같은 행위이며, 또한 본절은 앞절에 기록된 말씀의 결론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관한 39개 세부 조항을 만들어 사람들을 정죄하고 힘들게 만들었지만, 본 절은 안식일의 참 의미가 본래 사람들을 위한 것이라는 가르침을 분명하게 전해준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사람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려주셨다.
28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So the Son of Man is Lord even of the Sabbath."
이러므로
이는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에는 없는 단어이며, 앞문장과 뒷문장이 원인과 결과의 관계에 있음을 나타낸다. 여기서는 앞문장과 이어진다기 보다 내용상 안식일에 관한 논쟁 전체의 결론을 위해 도입된 말이라고 볼 수 있다.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의 규정을 만들고 이를 지키는 데에는 열심이었지만 안식일이 왜 있는지에 대한 진정한 의미는 깨닫지 못하였다. 그 결과 그들은 사람들에게 안식을 제공하지 못했고, 오히려 정죄와 억압, 죄의식의 굴레만을 덧씌웠을 뿐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와 안식을 가르쳐 주시고, 회복시켜 주셨다.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를 아시는 것은 안식일을 만드신 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이야말로 안식일의 주인이시며, 또한 모든 날들의 주인이신 것이다.
예수님이 모든 날들뿐만 아니라 안식일에도 주인이신 것은 '~도'에 해당하는 '카이'가 '그리고'라는 순접 접속사뿐만 아니라 부사로서 '역시'라는 의미로 사용되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본문은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처럼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로 번역되지 않고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로 번역된 것이다.
2장에는 예수님의 신적인 권위에 도전하는 바리새인들이 율법에 대한 자신들의 인위적 규범을 근거로 제시하고 예수님을 책잡으려는 시도를 다루고 있는 네 편의 논쟁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인자'에 해당하는 '호 휘오스 투 안드로푸'라는 명사구가 네 편의 논쟁 가운데 죄사함의 권세(1-12절)를 다룬 첫 번째 단락(10절)에서 한 번 사용되었고, 안식일 논쟁(23-28절)을 다룬 네 번째 단락에서 다시 한 번 사용됨으로써 수미쌍관의 구조를 이루고 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에 있어서 반론을 펴지 못할 정도로 명쾌한 답변들을 제시하셨다. 각각의 답변들을 살펴보면 논쟁을 일으킨 행위의 중심 주체이자 답변자이신 예수님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점진적 계시가 드러나 있다. 예수님의 답변에 의하면 죄를 사하는 권세가 있으시고(10절),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셨으며(17절), 지금은 함께 있지만 언젠가는 빼앗기게 될 혼인집 신랑이자(19절) 새로운 복음을 가져오신 새 포도주이시고(19절), 안식일의 주인(28절)이신 분이다. 이 모든 예수님의 정체성은 '인자'라는 호칭으로서 둘러싸여 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가리켜 사용하신 '인자'라는 호칭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칭하시는 '여호와'라는 호칭과 닿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