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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 마가복음

마가복음 3장

아리마대 사람 2017. 1. 21. 00:32

************ 마가복음 3장 ************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시며 귀신을 쫓아내시고 큰 무리의 사람들이 따르는 가운데 12명의 제자들을 세우셨다. 바리새인, 서기관들과의 갈등이 고조된다.


1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Another time he went into the synagogue, and a man with a shriveled hand was there.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본문은 '그리고'에 해당하는 접속사 '카이'로 시작된다. 이는 본 단락의 내용이 앞 단락과 이어짐을 보여준다. 본 단락(1-6절)은 앞 단락(2:23-28)과 동일하게 안식일에 일어난 일이며, 안식일의 의미에 관한 교훈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접속사의 사용을 통해서 앞 단락과는 별개의 사건을 다루고 있음을 나타낸다. 앞 단락은 밀밭에서 있었던 일이고, 본 단락은 회당에서 있었던 별개의 사건이다. 또한 본 단락의 안식일과 앞 단락의 안식일은 서로 다른 날이었다.

(누가복음 6:1)
1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실새 제자들이 이삭을 잘라 손으로 비비어 먹으니
(누가복음 6:6)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예수님께서 "회당"에 에 들어가신 이유는 그날이 회당에서 모임을 갖는 안식일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예수님께서 들어가신 회당이 어느 회당인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으나 "다시"에 해당하는 '팔린'이 사용된 것으로 보아 아마 이전에 들어가신 바 있는 회당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팔린’은 마가가 자주 사용하는 표현으로서 예수님께서 회당에 출입하시는 일이 처음이 아니고 일상적이었음을 보여준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으로서 이 땅에서 사셨음을 의미하며, 또한 초기 사역 때 많은 사람들이 모이는 희당을 복음 전도의 장소로 자주 이용하셨다고 생각할 수 있다.

(마가복음 1:21)
21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마가복음 1:39)

39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
(마가복음 6:2)
2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초대 교회 시대의 사도들도 이를 따라 행했다.

(사도행전 9:20)

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사도행전 13:5)

5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새 요한을 수행원으로 두었더라
(사도행전 13:14)

14 그들은 버가에서 더 나아가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으니라
(사도행전 14:1)

1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사도행전 17:10)

10 밤에 형제들이 곧 바울과 실라를 베뢰아로 보내니 그들이 이르러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니라
(사도행전 18:4)

4 안식일마다 바울이 회당에서 강론하고 유대인과 헬라인을 권면하니라
(사도행전 18:19)

19 에베소에 와서 그들을 거기 머물게 하고 자기는 회당에 들어가서 유대인들과 변론하니
(사도행전 19:8)

8 바울이 회당에 들어가 석 달 동안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관하여 강론하며 권면하되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손"에 해당하는 '케이라'의 원형 '케이르'는 신체의 한 부분으로서 손뿐만 아니라 팔이나 손가락 등도 가리키므로 "손 마른 사람"의 병이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였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마른"에 해당하는 '엑세람메넨'의 원형 '엑세라이노'는 '(물이) 마르다', '(식물이) 시들다'라는 의미이며, 비유적으로 신체의 일부가 굳어지는 상태를 나타낸다. 이 단어는 9:18에서는 말 못하게 귀신 들린 아이에 대해 '파리해지다'라는 의미로 번역되기도 했다.

(마가복음 9:18)
18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이와 같은 의미를 통해 "손 마른 사람"은 사고나 중풍 등의 질병으로 인해 손이나 팔을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였음을 알 수 있다. 누가복음 6:6을 참고하면 이 사람은 오른손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다.

(누가복음 6:6)
6 또 다른 안식일에 예수께서 회당에 들어가사 가르치실새 거기 오른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누가는 의사였으므로 보다 상세하게 기록한 것으로 생각된다.

 

2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Some of them were looking for a reason to accuse Jesus, so they watched him closely to see if he would heal him on the Sabbath.

사람들이 예수를 송사하려 하여

"사람들이"에 해당하는 별도의 단어가 원문에는 나타나 있지 않으나, 사용된 동사가 3인칭 복수형이므로 '그들이', '사람들이'의 의미로 번역할 수 있다. 여기서 "사람들"은 6절을 참고할 때 바리새인들을 가리킨다.

안식일에 

2장 후반부에 기록된  앞 단락은  안식일의 의미에 관한 교훈, 즉 다윗이 시장했을 때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는 진설병을 먹은 것처럼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진 안식일의 율법이 사람이 당한 위급한 상황보다 선행될 수 없다는 의미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여기서도 안식일에 일어난 사건과 이 사건을 통한 가르침이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구성은 마가가 사건을 기록함에 있어서 연대기적으로 배열하기보다는 주제별로 모아서 기록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엿보거늘

"엿보거늘"에 해당하는 '파레테룬'의 원형인 '파라테레오'는 '곁에서' 또는 '옆에서'라는 뜻을 갖는 '파라'와 '주시하다'라는 뜻을 갖는 '테레오'가 결합된 단어이며, '면밀하게 지켜보다', '몰래 살피다', '보초를 세워 지키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종교적인 문맥에서는 '신중한 태도로 준수하다'라는 의미도 갖는다. 이러한 의미를 바탕으로 생각할 때, 이들은 우연히 예수님을 회당에서 만난 것이 아니며, 앞 단락에서 자신들이 따르는 규례를 무시하고 예수님 자신이 새롭게 가르쳐 주신 안식일의 의미와 관련하여 예수님을 정죄하기 위한 구체적인 증거를 잡기 위해 예수님을 감시하며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동사가 행동의 반복이나 계속을 보여 주는 미완료의 시제로 기록된 점을 보면, 예수님을 궁지에 빠뜨리기 위해 바리새인들이 지속적으로 감시했음을 알 수 있다.


3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Jesus said to the man with the shriveled hand, "Stand up in front of everyone."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에 해당하는 원문에는 장소의 이동 방향을 나타내는 전치사 '에이스'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이 말은 '일어나서 가운데로 가라' 또는 '한 가운데로 가서 서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송사하기 위한 죄목을 찾기 위해 엿보고 있었지만, 이를 모두 알고 계신 예수님은 오히려 위축되지 않으시고 당당하게 손 마른 사람을 사람들이 잘 볼 수 있는 곳에 세우셨다. 이는 명확하게 가르침을 주시기 위한 목적이기도 했을 것이다.


4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Then Jesus asked them, "Which is lawful on the Sabbath: to do good or to do evil, to save life or to kill?" But they remained silent.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에 해당하는 부정사 '소사이'의 원형 '소조'는 '목숨을 건지다', '질병과 고통으로부터 구원하다', '심판으로부터 구원하다' 등의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으며, 이는 육체의 생명 뿐 아니라 영혼의 구원까지 포함하는 포괄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유대인의 율법 연구를 집대성한 '할리카'의 해석에 따르면 안식일에 생명을 구하는 일은 반율법적 행위가 아니며,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고치신 것은 잘못된 것이 아니지만, 바리새인들은 생명이 위급한 경우에만 치료 행위를 해야 한다는 매우 인위적인 규정을 세워 놓았다. 따라서 그들의 입장에서는 손 마른 자의 병이 당장 고치지 않으면 안 될 중요한 병이 아니므로 굳이 안식일에 고쳐서는 안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바리새인들의 율법 해석의 불완전성을 지적하시고 완성된 해석을 선포하신 것이었다. 앞 단락의 2:27에서 가르쳐 주신 바에 따르면 안식일은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며, 본 단락에서 가르쳐 주고 계신 바에 따르면 안식일에는 선을 행하고 생명을 구하는 것이 옳은 일이다. 즉, 안식일은 사람의 생명을 구하고 피조물을 타락 이전의 상태로 회복시키는 것이 목적인 것이다.

(마가복음 2:27)
27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어느 것이 옳으냐 하시니

예수님의 이 질문은 마태복음에서는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라는 가르침으로 나타나며, 이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서 말씀하신 것으로 나타난다.

(마태복음 12:10-12)
10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물어 이르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11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12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바리새인들은 지속적으로 예수님을 율법을 어긴 자로 고발하고자 했다(2절). 마태복음에서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율법을 어겼다고 고발하기 위해 함정을 파고 질문을 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마가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이미 모든 것을 아시고 먼저 질문을 하신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들이 잠잠하거늘

'잠잠하거늘'에 해당하는 '에시오폰'의 원형 '시오파오'는 '침묵하다', '조용해지다'라는 의미를 갖고 있으며, 비유적으로 사용되는 경우에는 '비바람이 잔잔해지다'라는 의미도 갖는다. 누가복음 1:20에서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가 성전에서 천사 가브리을 만난 후에 말을 할 수 없게 된 경우에도 이 단어가 사용되었다.

(누가복음 1:20)
20 보라 이 일이 되는 날까지 네가 말 못하는 자가 되어 능히 말을 못하리니 이는 네가 내 말을 믿지 아니함이거니와 때가 이르면 내 말이 이루어지리라 하더라

예수님을 고발하려던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의 질문에 대해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것은 할 말이 있는데도 안 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권위와 가르침에 눌려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상태였음을 보여 준다. "잠잠하거늘"은 미완료형으로서 그들이 계속적으로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고 잠잠했음을 나타낸다.


5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He looked around at them in anger and, deeply distressed at their stubborn hearts, said to the man, "Stretch out your hand." He stretched it out, and his hand was completely restored.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탄식하사"에 해당하는 '쉴뤄푸메노스'의 원형 '쉴뤄페오'는 '함께'라는 뜻의 '쉰'과 '슬퍼하다, 괴로워하다'라는 뜻의 '뤼페오'가 결합된 단어로서 '(어떤 사람으로 인하여 또는 그와 함께) 깊이 슬퍼하다, 고뇌하다'라는 의미이다. 자신들을 구원하러 온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인 예수님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안식일로 대표되는 율법에 대한 편협한 해석에 연연하여 예수님을 판단하고 정죄하려는 바리새인 무리들의 어리석음과 완악함을 깊은 연민과 안타까움으로 바라보고 계심을 나타낸다.

"노하심"에 해당하는 '오르게스'의 원형 '오르게'는 사람에게 적용되는 경우 일반적으로 '화', '분노', '분개' 등의 감정을 나타내며, 이런 식의 감정 표출은 대개 부정적으로 언급된다.

(야고보서 1:20).

20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그러나 본문과 같이 악에 대한 신적 반응으로서 언급되면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과 형벌이라는 다른 의미를 갖게 된다.

(로마서 1:18)

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또한 이 분노는 마지막 심판의 때에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자들에게 쌓였다가 부어지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진노'를 나타낼 때도 사용되었다.

(로마서 2:5)

5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요한계시록 6:17)

17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 하더라

(요한계시록 11:18)

18 이방들이 분노하매 주의 진노가 내려 죽은 자를 심판하시며 종 선지자들과 성도들과 또 작은 자든지 큰 자든지 주의 이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상 주시며 또 땅을 망하게 하는 자들을 멸망시키실 때로소이다 하더라

예수님의 노하심 역시 공의의 분노이다. 이는 바리새인들이 자신을 고발하고 죽이려는 음모를 꾸미려는 사실 때문이 아니고 그들이 부인할 수 없는 진리의 말씀, 여기서는 특별히 안식일에 관한 말씀을 듣고도 완악함을 버리지 않고 이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있으며, 이로부터 비롯되는 결과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마태복음 23:13-15)
13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14 (없음)
15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

"탄식하사 노하심으로"는 예수님께서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바리새인 무리들의 완악함을 깊은 연민과 안타까움으로 바라보시는 동시에 잘못된 믿음을 통해 구원을 잃어버리게 만드는 그들의 완악함의 결과에 대해 공의로운 신적 분노를 품고계심을 나타낸다.
예수님의 감정 상태에 대해 기록한 본문의 내용은 동일한 기적이 기록된 마태복음 12:13이나 누가복음 6:10에는 없는 내용이다.

(마태복음 12:13)

13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
(누가복음 6:10)
10 무리를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그리하매 그 손이 회복된지라

마가복음은 대체로 다른 복음서에 비해 예수님의 감정 상태에 대해 더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는 예수님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베드로로부터 유래한 것일 수 있으며, 마가는 이러한 표현을 통해 예수님이 신성뿐 아니라 인성도 동시에 지니신 분이심을 나타낸다.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는 예수님이 손 마른 사람을 치유하는 과정을 나타낸다. 예수님은 '네 손을 내밀라'고 말씀하셨고, 손 마른 사람이 손을 '내밀매' 회복이라는 결과가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네 손을 내밀라'는 말씀은 명령이자 복음을 가리키며, '내밀매'라는 행위는 믿음과 순종이다. 이 결과가 회복과 구원인 것이다.

"회복되었더라"에 해당하는 '아페카테스타데'의 원형 '아포카디스테미'는 '(이전 상태로) 돌아오다, (원래 위치나 조건으로) 복원하다'라는 의미이다. 이 단어는 신체적 회복, 영적 회복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회복, 하나님 나라의 회복을 나타낼 때도 사용되었다. 따라서 손 마른 이 사람의 회복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 즉 하나님의 첫 창조 질서를 회복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나 하나님의 첫 창조 질서의 회복은 첫 창조보다 더 나은 상태, 즉 새 하늘과 새 땅으로서 나타날 것이다. 예수님의 재림과 함께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지는 때에는 손 마른 자와 같은 우리들이 자신을 내밀 때, 즉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 모두 온전하게 회복되어 주님과 영원한 생명을 누리며 영화롭게 살게 될 것이다.


6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Then the Pharisees went out and began to plot with the Herodians how they might kill Jesus.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곧"이라는 말은 바리새인들의 완악함을 직접적으로 나타낸다. 그들은 즉시 예수님을 죽일 방안을 논의한다.

"헤롯당"은 신약 성경에서 단 두 번, 마가복음에서만 언급된다. 이들은 헤롯 가문과 헤롯 왕정, 로마법을 지지하고 로마의 지배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유대인들이었으며, 예수님 당시의 헤롯당은 예수님께서 주로 활동하셨던 갈릴리 지방을 다스리던 분봉 왕 헤롯(헤롯 안디파스)의 추종자들이었다. 이들은 본문에 나타난 것처럼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바리새인들과 동조하여 난해한 질문을 하는 자들이었다.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는 세속적 정치 종파인 헤롯당과 철저한 유대교 중심의 민족주의자들이며 종교인이었던 바리새인들이 함께 연합하여 예수님을 반대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음을 나타내며,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의 존재가 종교계에만 위협을 가한 것이 아니라 정치계에도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 기득권을 쥐고 있던 그들은 예수님을 자신들이 주도하는 기존 질서를 위협하는 자로 여겼던 것이다. 후에 그들은 연합하여 예수님을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 '가이사에게 세를 바쳐야 하는가'를 질문했다.

(마가복음 12:13)

13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책잡으려 하여 바리새인과 헤롯당 중에서 사람을 보내매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하지 말 것을 가르치셨다.

(마가복음 8:15)
15 예수께서 경고하여 이르시되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시니

본문은 비교적 사역의 초기 상황을 기록하고 있지만, 서로 적대 관계에 있었던 바리새인과 헤롯당이 연합전선을 펴야 할 정도로 예수님의 명성이 이미 널리 알려진 상황임을 보여준다.


7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따르며
  Jesus withdrew with his disciples to the lake, and a large crowd from Galilee followed.

▼7절부터 12절까지는 예수님의 갈릴리 전기 사역 가운데 제1차 갈릴리 사역 기록을 마감하는 부분이다. 여기에는 예수님께서 핍박하는 자들을 피하여 한적한 곳에 은거하셨으나 많은 무리들이 몰려왔다는 내용과 예수님께 큰 능력과 권세가 있어 치유가 있었고 귀신까지도 굴복하였다는 내용이 기술되고 있다. 마가는 예수님의 제1차 갈릴리 사역을 이러한 내용으로 마감함으로써 잠시도 쉬지 않고 일하시는 종으로서의 모습과 크나큰 권세를 지니신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모습을 다시 한번 강조하여 보여준다.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라는 구절은 6절의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라는 구절과 댓구를 이루며, 동시에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여기서 "함께"에 해당하는 전치사 '메타'는 단순히 '함께'라는 의미 외에 이면적으로는 '떨어질 수 없는 깊은 관계에 있다'라는 의미도 갖는다.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의 연합은 관심과 성향이 완전히 다른 집단이 오로지 예수님을 제거하기 위해 일시적이고도 정략적으로 연합한 것이었지만, 예수님과 제자들의 연합은 생명을 걸고 따라야 하는 불가분의 관계이자 인격적 동거로서 서로 대조를 이룬다.

바다로 물러가시니

"바다로 물러가신" 이유가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동일한 사건을 기록한 마태복음을 참고하면 바리새인들이 자신을 죽이려는 음모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고 그 음모와 그 장소를 피하여 떠나신 것임을 알 수 있다.

(마태복음 12:14-15)
14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거늘
15 예수께서 아시고 거기를 떠나가시니 많은 사람이 따르는지라 예수께서 그들의 병을 다 고치시고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의 음모 때문에 바닷가로 떠나신 것은 목숨을 잃는 것이 두려워서 피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십자가를 목전에 두고 고뇌 가운데 하나님께 기도 드릴 때에도 죽음을 피하지 않으셨다. 여기서 바다로 물러가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십자가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이며, 또한 이 땅에 오신 사명을 수행하셔야 했기 때문이다.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따르며
"큰 무리"에 해당하는 ' 폴뤼 플레도스'는 8절의 "많은 무리"를 가리키는 단어이기도 하다. 또한 10절의 "많은 사람"에 해당하는 '폴루스'는 '폴뤼'의 복수형으로서 동일한 단어이다. '큰' 또는 '많은'이라는 뜻을 가진 '폴뤼'는 단순히 수나 양이 많다는 의미 뿐만 아니라 어 떤 집단 가운데 대다수라는 의미도 갖는다. 이 의미를 통해서 보면 예수님을 죽이려 하는 바리새인 등의 무리가 소수인 데 비해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대다수였음을 알 수 있다. 마가는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 예수님을 계략에 빠뜨리고 심지어 죽이려고 모의하는 적대자들을 언급한 후에 그들의 숫자에 비해 훨씬 많은 수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랐음을 대조시켜 예수님이 행하신 사역과 전하신 복음의 능력을 말하고 있다.

 

8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 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많은 무리가 그가 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오는지라
  When they heard all he was doing, many people came to him from Judea, Jerusalem, Idumea, and the regions across the Jordan and around Tyre and Sidon.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 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이 구절에 나열된 지명들을 보면 바리새인들과 헤롯당 등의 무리들이 예수님을 핍박하고 죽이려는 논의를 하는 가운데에서도 예수님의 사역과 복음 전파가 이스라엘 땅에 널리 확산되었음을 보여준다. 또한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1:7)"라고 말했던 세례 요한의 사역에서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1:5)"이 언급되었던 것과 비교하여 예수님의 사역은 더 크고 널리 전파되었음을 나타낸다.
앞 절의 갈릴리를 포함하여 생각하면 "갈릴리와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는 요단강 서쪽 지방을 가리키고, "요단 강 건너편"은 요단강 동쪽 지방을 가리키며, "두로와 시돈"은 북서쪽 지방을 가리킨다. 이는 구체적인 지역을 언급하려는 것보다 온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한 표현이다. 또한 이는 예수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1:14) 가버나움에서 행하신 일들이(1:21)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고(1:28) 이제는 온 이스라엘에 퍼지게 되었음을 나타낸다.
여기서 "이두매"에 해당하는 '이두마이아스'는 히브리어 '에돔'의 헬라어 음역이다. 에돔이라고 불리우던 이 지역은 구약 당시의 모압 남부 산지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주전 586년에 예루살렘이 멸망한 후에 아랍 족속에 의해 쫓겨나 이주하였던 예루살렘 서남부 30km 정도에 위치한 지역을 가리킨다. 이들은 B.C. 2세기 하스모니아 왕조 시대에 힐카누스에 의해 유대교를 받아들였다. 헤롯 왕이 이두매 출신이다.

참고로,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은 로마에 의해 다음과 같은 행정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많은 무리가 그가 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오는지라

"그가 하신"에 해당하는 '에포이에이'는 주어가 없는 동사지만, 번역과정에서 주어를 추가하였다.
"큰 일을"에 해당하는 '호사'는 '모든 일'로 번역하는 것이 더 정확한 번역이다. 
"듣고"에 해당하는 '아쿠온테스'는 과거 분사 능동태이므로 '나아오는지라'라고 번역된 과거 능동형과 연결되기 위해서는 '들으면서'라고 번역되어야 한다.
"나아오는지라"에 해당하는 '엘돈' 다음에는 '그를 향하여' 또는 '그에게로'라는 뜻의 '프로스 아우톤'이라는 전치사구가 있으나 번역과정에서 누락되었다.
따라서 이 구절을 원문대로 번역하면 '많은 무리가 그가 하신 모든 일을 들으면서 그에게로 나아오는지라'가 된다.
이 구절은 온 이스라엘의 많은 사람들이 소문을 주워 듣고 예수님께 일순간에 몰려든 것이 아니라, 예수님에 관한 상세한 소문이 온 이스라엘에 퍼졌고 이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이곳 저곳에서 계속해서 몰려들었음을 묘사하는 것이다.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이 아니라 그 일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복음과 행하신 치유를 통해서 바리새인이나 헤롯당과 같이 예수님을 죽이려는 자들이 생겨나기도 했지만, 동시에 그분의 말씀과 능력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이와 같이 복음에 대한 대조적인 반응은 그 때는 물론이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어떤 자들에게는 복음이 거리끼는 것, 미련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하고, 어떤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 하나님의 지혜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23-24)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과연 나 자신은 복음을 믿고 예수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자인지, 아니면 복음을 무시하고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인지를 점검해야 한다.


9 예수께서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작은 배를 대기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니
  Because of the crowd he told his disciples to have a small boat ready for him, to keep the people from crowding him.

예수께서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예수님께 나아온 많은 사람들 중에는 "그가 하신 큰 일(8절)", 특히 치유의 소문을 듣고 나아온 병자들이 많았으며 이들은 예수님을 에워싸고 만지고자 했으므로 몹시 혼란스럽고 사고의 위험이 큰 상황이었다.
작은 배를 대기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니
"대기하도록"에 해당하는 '프로스카르테레'는 '꾸준히 지속하다, 끈기있게 노력하다', '기다리다'라는 의미이다. 이 단어는 예수님의 승천 이후 함께 모여 기도했던 사람들을 묘사하는 데에 사용된 단어이기도 하다.
(사도행전 1:14)
14 여자들과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과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더라
예수님은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신적인 방법을 사용하실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사역 외에는 이적을 행하지 않으심으로써 당시 헬라 사회에 성행했던 미신적인 '신적 인간'으로 비치는 것을 철저히 경계하셨다.


10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몰려왔음이더라
   For he had healed many, so that those with diseases were pushing forward to touch him.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이스라엘 땅의 많은 무리들에게 전해진 "그가 하신 큰 일(8절)" 가운데에는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을 고친신 일(1:23),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신 일(1:30),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신 일(1:34), 나병환자를 고치신 일(1:40), 중풍병자를 고친신 일(2:3), 한쪽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신 일(3:1) 등 병자들을 고치신 일이 포함되어 있었다.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병으로"에 해당하는 '마스티가스'는 '채찍'이라는 의미이며, 복수로 사용되면 심한 고통을 주는 '채찍질'이라는 의미가 된다. 그리고 본 구절과 같이 비유적 의미로 사용되면 '역병과 같은 심한 육체적 질병'이나 그로 인한 '고통, 고뇌' 등을 가리킨다. 헬라어 번역본인 70인역에서는 '하나님의 징계'라는 의미로도 사용되었다.
"고생하는"에 해당하는 '에이콘'의 원형 '에코'는 단순히 '갖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이 구절을 번역하면 단순히 '중한 병을 가진 자들이'가 된다.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몰려왔음이더라
"몰려왔음이더라"에 해당하는 '에피핍테인'의 원형 '에피핍토'는 '덮쳐오다, 압박하다, 다가오다'의 의미이다.
예수님께 나아온 많은 사람들 중에서 특별히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병을 고침 받기 위해서 예수님을 만지고자 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모인 데다가(8절),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은 절박했으므로 서로 밀고 밀리고 있었기 떄문에(9절) 몹시 혼란스럽고 사고의 위험이 있었다. 이는 치유와 구원이 필요했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의 비참한 지경에 대한 묘사이기도 하고, 그들에게 예수님이 간절히 필요했음을 보여주는 묘사이기도 하다.


11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Whenever the evil spirits saw him, they fell down before him and cried out, "You are the Son of God."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은 귀신들에게는 공포를 느낄 만큼 심각한 문제였다. 귀신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는 것, 그리고 그분이 귀신들을 멸하실 수 있는 권세를 가지신 분이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가복음 1:23-24)

23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그래서 귀신들은 예수님을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은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이 구절은 더러운 귀신들이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 말은 더러운 귀신들이 직접 한 것이 아니라 귀신이 지배하고 있던 귀신들린 자의 입을 통하여 나온 것이다.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매우 강조되어 있다. 마가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선언함으로써 시작되며(1:1), 하나님의 직접적인 선언이 이어지고(1:11, 9:7) 로마 백부장의 고백으로 마감된다(15:39). 또한 하나님의 선언과 인간의 고백 외에 귀신의 고백(3:11, 5:7)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이를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 아들이시라는 사실이 너무나 분명하게 확인된다.
이러한 기록들 가운데에서도 본 구절의 기록만이 가지는 특징이 있다.
"당신은"에 해당하는 2인칭 단수 대명사 '쉬'가 사용되었다는 것이다. 
"이니이다"에 해당하는 자동사 '에이'는 '쉬' 뒤에 나오며 2인칭 단수 인칭 대명사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으므로 앞의 '쉬'는 생략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기록한 것은 바로 자신 앞에 있는 예수님을 정확하게 가리키기 위함이다.
"아들"에 해당하는 '휘오스' 앞에는 정관시 '호'가 붙어있다.
"하나님의"에 해당하는 '데우' 앞에도 정관사 '투'가 붙어 있다. 정관사들은 생략되어도 의미 전달에 지장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정관사의 사용으로 인하여 예수님이야말로 '유일하신 하나님'의 '유일하신 아들'임이 강조된다. 즉 이 분이 바로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야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로마나 헬라 문화권에서는 황제나 영웅을 가리켜 '신의 아들'이라고 칭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와 같은 세상의 호칭을 넘어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자이심을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당시에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조차 명확히 알지 못했던 사실을 귀신들이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은 귀신들이 영적 분별력을 가졌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귀신들의 고백을 신앙고백이나 예수님께 복종하겠다는 의사 표시로 볼 수는 없다. 만약 그러했다면 "당신"이라는 호칭 대신 '주'라는 호칭을 사용했을 것이다. 이와 같은 귀신들의 고백을 볼 때, 지식과 신앙은 별개의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당시의 "더러운 귀신들"과 같이 예수님과 기독교에 대한 지식은 가지고 있으나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이 이를 잘 보여준다.


12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시니라
   But he gave them strict orders not to tell who he was.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시니라
"예수께서"에 해당하는 단어가 원문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번역과정에서 추가되었다. 그리고 '그들에게'에 해당하는 '아우토이스'가 번역되지 않았다.
"많이"에 해당하는 '폴라'는 횟수나 양이 '많다'는 의미이며, 시간적으로 '오래도록' 또는 '길게'라는 의미도 있다. 여기서는 '매우', '엄격하게', '강하게'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 구절을 번역하면 '그리고 (예수께서) 그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엄하게 경고하시니라'가 된다.

예수님은 귀신을 내어 쫓으셨을 뿐만 아니라 귀신들이 말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으시는 권세, 곧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위엄과 권세를 지니고 계셨다.
"예수께서 자기를 나타내지 말라고 많이 경고하시니라"는 내용은 마태복음에는 나타나 있지 않으며, 누가복음의 경우에는 "말함을 허락지 아니하셨다"라고만 기록해 놓고 있다.
(누가복음 4:41)
41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들이 나가며 소리질러 가로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으사 저희의 말함을 허락지 아니하시니 이는 자기를 그리스도인줄 앎이러라
이로부터 마가복음은 다른 복음서들보다 예수님께서 자기에 관해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내용이 강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귀신들이 자기에 관해 말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신 이유는 세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 더러운 귀신들을 통하여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로 알려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둘째, 자신이 누구인지를 사람들이 스스로 깨닫고, 이 깨달음을 통해 믿음의 고백을 하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다.
셋째, 예수님께서는 자신에게 맡겨진 구원의 사역, 곧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구속 사역을 완성하기 위한 때가 이르기까지의 기간 동안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게 하지 않으셔야 했다. 사람들이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알게 되는 것은 예수님의 사역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으며, 이 때부터 십자가를 준비하셨기 때문이었다. 대략 2년 반의 기간이 지난 후, 예수님께서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베드로의 고백을 들으신 후부터 죽음과 부활을 말씀하셨다.
(마가복음 8:29-31)
29 또 물으시되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 하매
30 이에 자기의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 경고하시고
31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 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사흘 만에 살아나야 할 것을 비로소 그들에게 가르치시되

▲7절부터 12절까지는 예수님의 갈릴리 전기 사역 가운데 제1차 갈릴리 사역 기록을 마감하는 부분이다.


13 또 에 오르사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Jesus went up on a mountainside and called to him those he wanted, and they came to him.

▼13절부터 19절까지는 예수님이 적대 세력을 피해 잠시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물러가셔서 제자들을 임명하심으로써 갈릴리 전기 사역 가운데 제2차 갈릴리 사역을 준비하시는 부분이다.

또 산에 오르사
본 구절부터 19절까지는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고 임명하시는 내용이 나온다. 이 내용과 관련하여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구성의 틀이 유사하지만 마태복음은 조금 다르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고난이 점증되고 있는 가운데 제자들을 소개하고 있지만, 마태복음은 약 1년 뒤에 있었던 갈릴리 전도 여행에서 제자들을 파송하시기 직전에 제자들을 소개한다(마태복음 10:1-4). 이러한 차이점은 복음서의 저자들에게 있어서 제자들을 선정한 시기를 밝히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제자들의 역할을 보여 주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마가복음과 누가복음은 예수님의 죽음 이후의 교회 사역을 대비하여 제자들을 선정하였음을 보여주고자 했으며, 마태복음은 제자들의 사명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임을 보여주기 위하여 전도 여행의 파송과 연결지어 기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산"에 해당하는 '토 오로스'에는 특정한 대상을 지시하는 관사 '토'가 포함되어 있으므로 '그 산'으로 번역할 수 있다. 이로 보아 이 "산"은 예수님께서 사역을 행하시는 가운데 자주 올라가셨던 어떤 산으로 생각할 수 있다. 특히 누가복음 6:12을 참고하면, 예수님은 그 "산"에서 밤새 하나님께 기도하신 후에 열두 명을 택하여 자신의 제자로 삼으셨다.
(누가복음 6:12-13)
12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13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그 "산"이 구체적으로 어디인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견해가 있다. 전승에 따라 예수님이 산상수훈을 가르치셨던 하텐 산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며, 한편으로는 가버나움 북부의 고원 지대라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선택하신 장소가 "산"인 까닭은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성경에서 산은 하나님의 계시가 인간에게 내려지는 장소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구약 시대에 모세는 시내산에서 하나님께로부터 십계명을 받았고(출애굽기 19:20), 엘리야는 호렙산에서 자신의 사역과 이스라엘의 운명에 대한 계시를 받았다(열왕기상 19:8). 예수님은 산에서 기도하셨고(6:46) 신령한 형상으로 변화하셨다(9:2). 열두 제자를 " 산"에서 선택하신 것은, 누가복음 6:12-13을 참고할 때, 열두 제자를 선택하는 일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루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둘째, 현실적으로 산은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들인 바리새파, 헤롯당 등으로부터 피할 수 있는 장소이며, 산에 오르는 일이 어렵다는 점에서 진심으로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자들의 접근을 막는 장소이다. 따라서 진심으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곳이라는 점에서 산에 오르신 이유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예수님이 시몬과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부르실 때(1:16-20)를 참고하면, 예수님은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보시고(1:16, 19)',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1:17)"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제자로 부르셨다. 제자의 선정 기준이 '예수님이 원하시는 뜻'이었던 것은, 첫째, 예수님께 모든 주권이 있기 때문이며, 둘째, 제자는 예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고 순종해야 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의 선정 기준부터 예수님의 뜻을 따른 것이다.
나아온지라
이 때까지 예수님 앞에 나아온 자들은 모두 자신들의 목적과 의도에 따라 나온 것이었다.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은 예수님을 감시하고, 비난하고, 고발하고, 죽이기 위한 목적으로 찾아왔으며,  이스라엘 사람들은 질병의 치유라는 목적을 위해 예수님을 찾아왔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뜻을 따라 선택되었고, '예수님의 부르심을 따라' 예수님 앞에 나아온 것이었다.

예수님 앞에 나왔지만, 그들 가운데는 예수님을 부인하거나 예수님을 의심하는 자가 있었으며 심지어 예수님을 배반하고 팔아넘기는 자까지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이들을 원하셨으며, 가롯 유다를 제외한 모두가 교회에 기둥같이 쓰이게 된다.


14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He appointed twelve--designating them apostles--that they might be with him and that he might send them out to preach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열둘"은 예수님께서 '사도로 부르신' 열둘을 가리키며, 이에 해당하는 '후스 카이 아포스톨루스 오노마센'이 번역과정에서 누락되었다.
"세우셨으니" 에 해당하는 '에포이에센'의 원형 '포이에오'는 사람의 행위와 관련될 경우에는 '만들다' 또는 '행동하다'라는 의미이며, 하나님께 적용되면 '창조하다'라는 의미가 된다. 예수님은 고집스러운 어부나 탐욕스러운 세리 등을 제자로 세우시고(만드시고) 세계 선교라는 막중한 사명을 맡기신 것이다. 또한 열두 제자를 세우신 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므로 제자들은 신적 권능에 의해 세워진(창조된) 것이며, 따라서 제자들은 자신들을 불러 제자로서 새롭게 지으신(창조하신) 예수님의 뜻을 따라야 한다.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이 구절부터 15절까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우신 목적이 기록되어 있다. 그 목적은 "이는"과 "하심이니라"에 해당하는 '히나'라는 접속사(영어의 that)를 통해 크게 두 가지임을 알 수 있다.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가 첫 번째 목적이다.
참된 제자는 예수님과 동거해야 한다. 예수님과 함께 지내며 그분을 따르는 가운데 그분의 삶의 방식, 인품, 교훈, 하나님 나라에 관한 일 등 그분의 모든 가르침을 배워야 하기 때문이다.
이 목적은 참포도나무 비유에서 '내 안에 거하라'는 말씀과 같다.
(요한복음 15:4)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또 보내사 전도도 하며
"보내사"가 두 번째 목적이다.
두 가지의 목적은 동등하다고 볼 수 있지만, 선후에 있어서는 첫 번째 목적 이후에 두 번째 목적을 이룰 수 있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예수님과 함께 있고난 후에 보냄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이 목적은 참포도나무 비유에서 '열매를 많이 맺나니'라는 말씀과 같다. 예수님 안에 거하고 난 후에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는 것이다.
(요한복음 15:5)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예수님께서 보내시는 이유는 전도와 축귀(15절)이다. 이것이 파송된 제자의 사명이다.
"보내사"에 해당하는 '아포스텔레'는 '사도'에 해당하는 '아포스톨로스'의 동사형이다. 즉 제자란 '예수님이 전해주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세상에서 선포하는 자들'이다. 그래서 제자는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자들이며, 이를 위해 성령의 권능을 받아야 하는 것이다. 
(사도행전 1:8)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이로부터 세상으로 보냄을 받지 않고 교회 안에 머물기만 하면 예수님의 참된 제자라고 말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전도도 하며"에 해당하는 '케륏세인'은 '선포하다, 설교하다, 전하다'라는 의미로서 진리와 구원을 선포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말이다. 예수님의 참된 제자는 예수님의 증인으로서 세상에 나가 땅 끝까지 구원의 복음을 전하는 자를 가리킨다.


15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and to have authority to drive out demons.

귀신을 내쫓는 권능도 가지게 하려 하심이러라
예수님께서 제자를 세우시고 보내시는 두 번째 이유는 "귀신을 내쫓는 권능을 갖게 하시는 것"이다. 이의 목적은 당연히 귀신을 내쫓는 일, 곧 축귀이다. 이것이 파송된 제자의 사명이다. 동일한 내용을 기록한 마태복음 10:1은 귀신을 쫓아내는 것과 함께 병을 고치는 것까지 언급된다.
(마태복음 10:1)
1 예수께서 그의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따라서 이 구절에 언급된 "귀신을 내쫓는 권능"은 '병을 고치는 권능'을 포함한다고 볼 수 있다.
"귀신"에 해당하는 '타 다이모니아'는 명사 복수형이므로 '사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의 졸개인 '귀신들'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인은 타락한 천사로서의 귀신의 존재를 부정해서는 안되며 두려워해서도 안된다. 왜냐하면 복음의 능력을 소유한 자는 이 구절의 말씀과 같이 그들을 내어쫓는 권능도 부여받기 때문이다.
"귀신을 내쫓는 권능"은 단순한 기적의 행위, 치유의 행위가 아니다. 이는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단순한 관념적 구원에 머물지 않고, 실제적인 삶의 변화까지 가져온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이러한 삶의 변화가 귀신이나 질병으로부터의 자유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즉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란 결국 사단의 세력의 축소를 의미하는 것이며, "귀신을 내쫓는 권능"이란 악의 영들을 상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에베소서 6:12).
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


16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These are the twelve he appointed: Simon (to whom he gave the name Peter);

이 열둘을 세우셨으니 시몬에게는 베드로란 이름을 더하셨고
"베드로"는 '반석'이라는 뜻이며, 아람어로는 '게바'이다.
(요한복음 1:42) 
42 데리고 예수님께로 오니 예수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이 이름은 시몬이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했을 때, 예수님께서 이를 칭찬하시며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희를 세우겠다"라고 말씀하신 데서 유래한 이름이다.
(마태복음 16:18)
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그는 벳새다 출신이었다.
(요한복음 1:44)
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직업은 어부였으며, 일하던 중에 예수님에 의해 부름을 받았다.
(마가복음 1:16)
16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시몬과 안드레의 아버지의 이름은 요한이었다.
(요한복음 1:42) 
42 데리고 예수님께로 오니 예수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예수님께 부름 받을 당시에 이미 결혼하였으며 장모를 모시고 살았다.
(마가복음 1:29-30)
29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30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
그는 본래 배운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사도행전 4:13)
13 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하게 말함을 보고 그들을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 예수님의 수제자로서 모든 제자들 가운데 항상 가장 먼저 언급되었지만, 다혈질적인 성격으로 인해 예수님의 칭찬과 꾸중을 동시에 들었다. 십자가를 목전에 두고서는 모든 사람이 예수님를 버려도 자신만은 함께 하겠다고 공언하고서도 예수님께서 잡히시던 날에는 그를 알지 못한다고 세 번씩이나 부 인하기도 했다. 그러나 제자 가운데서 예수님의 부활을 가장 먼저 목격했다.
(고린도전서 15:4-5)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5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에는 초대 교회에서 지도자로서 활약했다. 수많은 사역을 감당한 뒤에 로마에서 순교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시몬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더하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은 본 구절에만 기록되어 있다. 누가복음 6:14에도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 시몬"이란 언급이 나오지만, 이에 해당하는 '오노마센 페트론'은 실제로는 '베드로라고도 불리우는'이라는 의미일 뿐이다.
(누가복음 6:14)
14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17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James son of Zebedee and his brother John (to them he gave the name Boanerges, which means Sons of Thunder);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레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보아너게"에 해당하는 '보아네르게스'는 '우레처럼 쉴새 없이 시끄럽게 하는 아들들'이라는 의미를 갖는 히브리어 '빼네 레게쉬'에서 파생된 것으로 보인다.
"우레의 아들"에 해당하는 '휘오이 브론테스'가 아들이라는 의미의 '휘오스'의 복수형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이 별명은 야고보나 요한 중 한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별명이 아니라 두 형제에게 붙여진 별명이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은 그들의 별명처럼 급하고 과격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목소리가 컸거나 말이 많았다고 짐작할 수 있다. 이들은 사마리아 지방 사람들이 복음 전도를 받아들이지 않자 예수께 불을 내려 멸하시도록 간구할 정도로 (누가복음 9:54) 복음 전도에 임하는 자세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열정적이고 과격했다.
이들은 시몬과 같이 어부였다.
(누가복음 5:10)
10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품꾼을 부릴 정도로 부유했다.
(마가복음 1:20)
20 곧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또한 예루살렘에 자신들의 집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사회적으로 유력한 집안의 사람이었다.
(요한복음 19:27)
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이들의 어머니인 살로메가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와 자매지간으로 추정되므로 이들은 예수님의 이종사촌이라고 볼 수 있다.
(요한복음 19:25)
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항상 야고보의 이름이 먼저 언급되는 점으로 보아 그가 요한의 형으로 짐작된다.
베드로와 이들 형제는 다른 제자들과 구분되어 따로 예수님과 동행하기도 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오르실 때 (9:2), 십자가를 앞에 놓고 간절한 기도를 드리기 위해 갯세마네 동산으로 나아갈 때 (14:32-33), 예수님과 함께 동행했다.
특히 요한은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의 사랑하는 제자'라고 표현될 정도로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제자였다. 그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갈라디아서 2:9)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 밧모 섬에 유배되었다가 하나님의 계시를 보았다(요한계시록 1:9). 후에 네르바 황제 때 에베소로 돌아와 그의 말년을 누림으로써 순교하지 않은 몇 안 되는 제자 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Irenius의 기록). 반면, 야고보는 헤롯 아그립바 1세에 의해 죽임당함으로써 사도들 중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사도행전 12:2).


18 또 안드레와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및 다대오와 가나나인 시몬이며
   Andrew, Philip, Bartholomew, Matthew, Thomas, James son of Alphaeus, Thaddaeus, Simon the Zealot

또 안드레와
"안드레"는 흔히 시몬과 함께 언급되곤 하지만 여기서는 시몬, 야고보, 요한 다음에 언급된다.
(마태복음 10:2)
2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니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형제 안드레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
(누가복음 6:14)
14 곧 베드로라고도 이름을 주신 시몬과 그의 동생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과 빌립과 바돌로매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저자는 혈연 관계를 중시했기 때문이고, 마가복음의 경우에는 제자들의 중요도에 관심을 더 두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안드레라는 이름은 '남성적인'이란 뜻을 지니고 있으며, 그는 원래 세례 요한의 제자였으나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고, 자신의 형 베드로에게 예수님을 소개한 인물이기도 하다.
(요한복음 1:35-42)
35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36 예수께서 거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37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거늘
38 예수께서 돌이켜 그 따르는 것을 보시고 물어 이르시되 무엇을 구하느냐 이르되 랍비여 어디 계시오니이까 하니 (랍비는 번역하면 선생이라)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와서 보라 그러므로 그들이 가서 계신 데를 보고 그 날 함께 거하니 때가 열 시쯤 되었더라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전승에 의하면 헬라와 소아시아 등지에 복음을 전하다가 십자가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빌립과
"빌립"에 해당하는 '필립폰'이란 이름은 문자적으로는 '말(馬)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베드로나 야고보와 같은 벳새다 출신이며, 어부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요한복음 1:44)
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그의 이름이 헬라식이라는 점과 헬라식 이름을 가진 나다나엘에게 예수님을 전했다는 사실 등으로 보아 헬라의 문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요한복음 1:45)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온 헬라인들이 빌립에게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요청했던 것으로 보인다.
(요한복음 12:20-21)
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21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하니
그는 매우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오병이어 사건 때에는 예수님이 행하실 기적을 기대하기보다는 현실적인 계산에 의존했다.
(요한복음 6:5-7) 
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7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또한 예수님께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요구하기도 했었다.
(요한복음 14:8)
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바돌로매와
"바돌로매"라는 이름은 '돌로매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바돌로매는 대개의 경우 빌립의 이름과 연이어 기록되어 있거나 함께 언급되는 점 등으로 미루어보아 빌립으로부터 예수님을 소개받았던 나다나엘과 동일한 인물로 추정된다.

(요한복음 1:45)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전승에 의하면 바돌로매는 인도에 가서 복음을 전했는데 마침내는 물에 빠뜨림을 당해 순교했다고 한다.

마태와
"마태"는 세관에 앉아 있다가 예수님에 의해 부름 받을 당시 '레위'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레위'가 본명이고, "마태"는 예수님께 받은 이름으로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후에는 주로 "마태"로 불렸던 것으로 보인다.
(마가복음 2:14)
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그는 세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들로부터 멸시의 대상이었다.
(마가복음 2:16)
16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그는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이후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는 등 과거의 삶을 버리고 변화되었으며, 제1복음서인 마태복음을 기록했다.
(마태복음 9:9-10)
9 예수께서 그 곳을 떠나 지나가시다가 마태라 하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0 예수께서 마태의 집에서 앉아 음식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와서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더니

도마와
도마는 요한에 따르면 '디두모'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이는 '쌍둥이'라는 의미이다.
(요한복음 11:16)
16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예수님께서 나사로에게 가고자 하셨을 때에 그는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라는 말로 예수님에 대한 층성을 나타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을 만났다고 말했을 때에는 자신이 직접 예수님의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의 창자국을 확인하기 전에는 믿지 않겠다고 했다.
(요한복음 20:25)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실제로 부활하신 예수님이 자신의 앞에 나타나서 확인해보라고 말씀하셨을 때에 비로소 자신의 믿음을 고백했다.
(요한복음 20:27-28)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전승에 따르면 초대 교회 당시에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는 세베대의 아들이자 요한의 형제인 야고보와 구별되어 "작은 야고보"라고 불린다. 나이가 더 적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마가복음 15:40)
40 멀리서 바라보는 여자들도 있었는데 그 중에 막달라 마리아와 또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살로메가 있었으니
그의 어머니는 예수님의 어머니와 동일한 마리아라는 이름을 가졌다.
그런데 2:14에서 마태, 즉 레위가 '알패오의 아들'로 소개된다.
(마가복음 2:14)
14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만약 이 알패오가 본 구절의 알패오와 동일한 사람이라면 작은 야고보는 마태와 형제 사이가 된다. 그러나 마가복음 15:40에서 "작은 야고보와 요세의 어머니 마리아"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작은 야고보"에게는 "요세"라는 이름의 형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및 다대오와
다대오는 '칭찬함'이라는 의미의 이름이다. "유다"라는 이름으로 불리우기도 했으며, 가룟 유다와 구별되었다.

(요한복음 14:22)
22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또한 "야고보의 아들"로 소개되기도 했다.
(누가복음 6:16) 
16 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
(사도행전 1:13)
13들어가 그들이 유하는 다락방으로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셀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가나나인 시몬이며
"시몬"은 "가나나인"이라는 표현을 통해 벳새다 출신인 시몬과 구별된다. 여기서 "가나나인"이라는 표현은 그의 출신지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열심'을 뜻하는 히브리어 '카나'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열심당원'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는 그가 이스라엘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키고자 결성된 열심당의 일원이었음을 나타내며, 또한 '열심당원'을 나타내는 '셀롯'과 동일한 의미이다.
(누가복음 6:15)
15 마태와 도마와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셀롯이라는 시몬과
이처럼 예수의 제자들 가운데에는 친로마주의자였던 세리 마태가 있었는가 하면 반대로 반로마주의자인 열심당원 시몬도 있었다. 상반된 이데올로기를 가진 그들이 함께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복음 전도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인간이 만들어낸 어떤 이념과 사상도 초월하는 유일한 진리라는 점을 부각시킨 다.
(로마서 10:12)
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9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and Judas Iscariot, who betrayed him.

또 가룟 유다니 이는 예수를 판 자더라
"가룟"이라는 말의 의미는 아람어로 '거짓말쟁이', 라틴어로 '염색하는 사람, 단검을 지니고 다니는 사람', '잇사갈의 남자' 등 어원적으로 다양하게 가정되고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으며, 그의 아버지인 시몬에게도 '가룟'이라는 말이 붙여져 있는 것으로 보아 '가룟 출신의 남자'라는 의미로 이해된다.
(요한복음 6:71)
71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예수님의 제자들 가운데 유다를 제외하고는 열한 명 모두가 갈릴리 출신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가룟의 위치는 불확실하나 유대 지방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유다는 제자들의 목록에 이름이 언급되고 있지만, 그의 선택과 소명 과정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의 소명은 다른 사도들의 소명과 차이가 없었던 것으로 추측되며, 그의 평상적인 행동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는 제자들의 모임에서 회계를 담당한 점으로 보아 재정을 관리하는 능력이 탁월했던 것으로 보인다.
(요한복음 12:4-6)
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세리 출신인 마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다가 회계를 담당한 것은 마태가 과거의 일과 관련을 맺지 않으려 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유다의 재정관리 능력이 인정받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요한복음에 따르면 제자들의 돈궤를 맡고 있던 그는 실제로는 탐욕으로 가득찬 '도둑'이었다. 이러한 탐욕으로 인해 그는 대제사장들에게 달려가서 예수님을 배반하는 대가를 협상했다. 또한 그는 예수님께서 정치적 메시야가 아니라 십자가를 지심으로 구속을 이루시는 메시야이심을 이해하지 못했다. 결국 자신의 스승인 예수님을 은 30냥에 유대교의 대제사장들에게 팔아넘겼고,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승을 판 사실을 비관하여 스스로 목을 매어 죽었다. 그의 이름에는 본 구절과 같이 항상 "예수를 판 자"라는 불명예스러운 호칭이 붙어 다닌다.
(마태복음 10:4)
4 가나나인 시몬 및 가룟 유다 곧 예수를 판 자라
(누가복음 6:16)
16야고보의 아들 유다와 예수를 파는 자 될 가룟 유다라

(요한복음 12:4-6)
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13절부터 19절까지는 예수님이 적대 세력을 피해 잠시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물러가셔서 제자들을 임명하심으로써 갈릴리 전기 사역 가운데 제2차 갈릴리 사역을 준비하시는 부분이다.


20 에 들어가시니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Then Jesus entered a house, and again a crowd gathered, so that he and his disciples were not even able to eat.

▼20절부터는 예수님의 갈릴리 전기 사역 가운데 제2차 갈릴리 사역을 재개하시고, 사역이 본격화되는 부분이다. 시역을 시작하시자마자 예수님의 친족들까지 예수님이 미쳤다고 오해하며, 율법 전문가인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공격하는 내용을 소개한다. 예수님에 대한 핍박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집에 들어가시니
"집"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사역을 재개하신 후의 사건들이 일어난 공간적 배경이다. 이곳은 예수님이 계시던 집을 가리키는데, 갈릴리 지역 전도의 전초 기지 역할을 했던 베드로의 집(1:29)일 수도 있고, 예수님이 갈릴리 선교의 본거지인 가버나움에 따로 마련하신 집(마태복음 4:13)일 수도 있다.
무리가 다시 모이므로
예수님께서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쫓아내신(1:25-26) 때부터 소문이 퍼졌고,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치신(1:31) 후부터는 가시는 곳마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마가복음 1:32-33)
32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33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
(마가복음 1:36-37)
36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37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마가복음 2:1-2)
1 수 일 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시다는 소문이 들린지라
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까지도 들어설 자리가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마가복음 2:13)
13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마가복음 3:7-10)
7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다로 물러가시니 갈릴리에서 큰 무리가 따르며
8 유대와 예루살렘과 이두매와 요단 강 건너편과 또 두로와 시돈 근처에서 많은 무리가 그가 하신 큰 일을 듣고 나아오는지라
9 예수께서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작은 배를 대기하도록 제자들에게 명하셨으니
10 이는 많은 사람을 고치셨으므로 병으로 고생하는 자들이 예수를 만지고자 하여 몰려왔음이더라
식사할 겨를도 없는지라
"식사할"로 번역된 '메데 아르톤 파게인'에서 '메데'는 '~할 만큼의'라는 뜻이고, '아르톤'은 '빵' 또는 '떡'이라는 뜻이며, '파게인'은 '식사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를 직역하면 '빵을 먹을 정도의'가 된다. 즉 정식으로 식사를 할 수 있을 정도의 시간이 충분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고 간단하게 빵으로 끼니를 때울 정도의 여유조차 없었다는 의미이다. 누가복음 6:12-13에 의하면 예수님은 밤새도록 산에서 기도하시고 제자를 임명하신 후 내려오셨는데, 자신을 기다리던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간단한 요기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당시 정황은 예수님에 대한 민중들의 관심이 점점 더 고조되고 있음을 잘 보여 준다.


21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When his family heard about this, they went to take charge of him, for they said, "He is out of his mind."

예수의 친족들이 듣고 그를 붙들러 나오니
"예수의 친족들이"에 해당하는 '호이 파르 아우투'는 '그에게 속한 자들' 또는 '그와 함께한 자들'이라는 뜻이다. 이를 '예수님의 친구들'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지만, 31절 이하에서 예수님의 가족들이 예수님을 데리러 오는 내용과의 연결을 생각하면 이들을 '예수님의 가족들'이라고 보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
"붙들러"에 해당하는 '크라테사이'의 원형 '크라테오'는 '체포하다'라는 의미이다. 이 단어가 '헤롯이 세례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었다(6:17)'는 기록 등에 사용되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예수님에 대한 가족들의 태도가 얼마나 살벌하고 무지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가족들이 보인 이런 부정적인 행태는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큰 영적 무지와 어리석음에 빠져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는가를 알려준다. 다른 공관복음서 기자들과 달리 마가는 날카로운 필치로 이 사건을 기록함으로써 예수님에 대한 당시 사람들의 영적 무지를 알리고 있다. 이런 점을 생각할 때, 예수님 자신의 사역을 이해하지 못하는 가족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사람들이 영적 의미에서 가족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반응을 이해할 수 있다.

이는 그가 미쳤다 함일러라

"그가 미쳤다"라는 반응은 예수님에 대한 평가 중의 하나였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엑세스테'의 원형 '엑시스테미'는 '~의 밖으로'라는 뜻의 전치사 '에크'와 '어떤 상황이나 관계 속에 있다'는 뜻의 동사 '히스테미'의 합성어로서 예수님이 '현재의 상황이나 현상들에 대하여 정상적인 이해가 불가능한 상태에 있다'는 의미이다. 요한복음은 '믿지 않았다' 정도로 기록하고 있지만, 실은 '미쳤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요한복음 7:5)
5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예수님에 대한 이런 단정적인 소문은 예수님의 가족들로 하여금 그를 집으로 데려가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했을 것이다. 특히 당시 이스라엘에서는 '미쳤다'는 말이 곧 '귀신이 들렸다'는 의미였다. 바로 다음 절을 보면,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이 예수님에 대해 '바알세불이 지폈다',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고, 30절에서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라고 말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님이 미쳤다고 생각하여 예수님을 잡으러 온 가족들에 관한 기록(21절), 예수님이 귀신 들렸다고 말하는 서기관들에 관한 기록(22절)과 예수님이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고 말하는 서기관들에 관한 기록(30절), 예수님을 찾는 가족들에 관한 기록(31절)이 예수님의 말씀(23-29절)을 앞뒤에서 둘러싸고 있는 문학적 구조는 예수님의 가족들의 무지와 서기관들의 모함이 예수니의 사역을 얼마나 방해하고 있었는지를 표현하고 있다.
"이는... 함일러라"에 해당하는 '엘레곤 가르 호티'에서 동사 '엘레곤'의 주어는 복수 3인칭이며, 일반적인 사람들을 가리킨다. 한편에서는 예수님에 대해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친다는 소문이 돌았고, 이로부터 기적을 행하는 능력의 소유자이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소문도 있었겠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귀신들려 미쳤다라고 하는 소문도 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멀리 예루살렘에서 온 서기관들(22절) 뿐만 아니라 가까운 곳에서 사역을 지켜본 갈릴리의 사람들이나 심지어 가족들(21절)까지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귀신들려 미친 사람으로 생각했다는 사실을 통해 볼 때, 예수님에 대한 오해와 비난과 배척과 영적 무지가 더 지배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22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그가 바알세불이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And the teachers of the law who came down from Jerusalem said, "He is possessed by Beelzebub! By the prince of demons he is driving out demons."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예루살렘에서"이라는 표현에는 마가의 의도가 나타나 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을 대적하고 그를 잡아죽이려는 자들의 본산지였기 때문이다. 당시 예루살렘 공의회는 율법 준수를 생명처럼 여기는 집단이었으며, 죄사함(2:1-12), 죄인과의 식탁 교제(2:13-17), 금식(2:18-22), 안식일(2:23-3:6) 등 종교적으로 매우 민감한 문제들에 관해서 예수님이 보인 모습은 그들에게 율법과 예루살렘의 공의회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처럼 보였을 것이고, 예수님을 자신들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했을 것이다.
"내려온"이라고 번역된 '카타반테스'의 원형 '카타바이노'는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이동한다는 의미의 표현이 아니고, 수도에서 지방으로 내려온다는 수사적 표현이다. 즉 예루살렘의 산헤드린 공회는 갈릴리 지방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동시에 평가가 엇갈리고 있는 예수님에 대해 보다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또한 자신들의 권위로써 예수님을 제압하기 위해 율법에 박식한 서기관들을 파견하였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바리새인들', '헤롯당'이라고 기록한 구절보다 훨씬 상세하고 구체적으로 예수님을 공격한 주체를 알려주고 있으며, 이들은 '바리새인의 서기관들(2:16)', 곧 바리새파에 속한 서기관들이었을 것이다.

그가 바알세불이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바알세불"은 문자적으로는 '똥의 주', '파리의 주'라는 의미를 가지며 여기서는 귀신들의 왕 사단을 가리킨다. 귀신들이 예수님의 말에 순종하고 있으므로, 귀신들의 왕인 사단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이런 일들을 할 수 없다고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정통 유대교 사상에 따르면 악한 영들의 세계라도 그곳을 통치하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다.
(욥기 1:6)
6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탄도 그들 가운데에 온지라
따라서 바알세불이라고 해도 귀신들의 세계를 완전히 장악하여 다스린다는 식의 사고는 용납될 수 없었다. 그럼 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에서 온 서기관들이 본문과 같은 주장을 하는 이유는 당시 이스라엘에는 헬레니즘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던 중간기를 거쳐 오면서 이미 이방의 이원론적 사고가 팽배해 있었고 또한 실제로 귀신의 힘을 빌어 주술적 치료 행위를 하는 있는 사교의 사제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는 그들이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축귀와 질병의 치유라는 놀라운 능력을 보여주셨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체험없이 율법에 대한 문자적이고 인위적인 해석에 묶여있던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로서는 예수님에 대해 바르게 깨달을 만한 영적 안목이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들은 이러한 놀라운 능력과 권세를 보여주시는 예수님에 대한 시기와 질투심와 두려움으로 무조건 예수님를 배척하며 시비거리를 찾는 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지폈다"에 해당하는 '에케이'는 '가졌다'라는 의미지만, 본문과 같이 '사람에게 귀신이 내려서 모든 것을 알아맞히는 신통하고 묘한 힘이 생기다'라는 번역이 본문의 문맥에 부합되는 번역이다. '에케이'의 원형 '에코'는 5:15에서 군대 귀신이 들렸던 자에게도 사용된다.
(마가복음 5:15)
15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귀신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이를 볼 때, 본문의 "지폈다"라는 표현은 귀신에게 완전히 사로 잡혔다는 의미로서 예수님에게 대단히 모욕적인 표현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니"에 해당하는 '엘레곤'은 '말했다'라는 의미의 직설법 미완료 능동태 복수 3인칭으로서 21절과 30절에서도 사용된다. 마가는 동일한 형태의 동사를 의도적으로 반복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예수님에 대한 평가를 기록했다. 21절에서는 예수님의 가족들의 평가를 기록하였고, 30절에서는 일반 사람들의 평가를 기록했으며, 여기서는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의 평가를 기록하고 있다.

 

23 예수께서 그들을 불러다가 비유로 말씀하시되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So Jesus called them and spoke to them in parables: "How can Satan drive out Satan?

예수님께서 그들을 불러다가 비유로 말씀하시되
본문의 내용은 마가만이 기록한 독특한 내용이다. 마태복음 12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귀신 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고쳐주시자 사람들은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라고 놀라워했고, 바리새인들은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라고 주장하며 그들 사이에 논쟁이 있는 것을 보신 예수님께서 '저희 생각을 아시고' 교훈을 말씀해 주셨다고 기록하였다.
(마태복음 12:22-25)
22그 때에 귀신 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데리고 왔거늘 예수께서 고쳐 주시매 그 말 못하는 사람이 말하며 보게 된지라
23무리가 다 놀라 이르되 이는 다윗의 자손이 아니냐 하니
24바리새인들은 듣고 이르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25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불러다가"라는 표현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온 서기관들을 따로 불러모아서 가르치셨다기보다는 예수님께서 그들을 대상으로 말씀하셨다는 의미로 보아야 한다.
사탄이 어찌 사탄을 쫓아낼 수 있느냐
"사탄이"는 '귀신들의 왕 바알세불'을 가리킨다.
"사탄을"은 '귀신들'을 가리킨다.
귀신들의 왕인 사탄은 그의 졸개들인 귀신들을 통해서 성도들을 미혹하여 더럽게 만들고 구원에서 떨어지게 한다. 따라서 사탄이 자신의 세력인 귀신들을 내어쫓는다는 서기관들의 주장은 논리적으로 완전히 모순되는 주장이다.
"어찌"에 해당하는 '포스'는 너무나 터무니없거나 실현 불가능한 말을 들어서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는 상태를 표현할 때 사용하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처녀 마리아가 수태고지를 받았을 때 사용되었다.
(누가복음 1:34)
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이까
또한 사마리아 여인이 유대인인 예수님께로부터 물을 달라는 말을 들었을 때 사용되었다.
(요한복음 4:9)
9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이처럼 이 말은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라는 의미이다. 또한 이 단어는 상대의 말이나 행동이 너무 악의적이거나 부당할 경우에 그것을 책망하기 위해서도 사용된다. 자신의 큰 허물을 감추고 상대의 조그만 실수를 지적하는 자들을 향해 예수님께서 이 단어를 사용하여 '어찌하여'라고 책망하셨다.
(마태복음 7:4)
4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따라서 이는 일차적으로는 사탄이 사탄을 내어쫓는다는 서기관들의 터무니없는 논리적 모순에 대한 어리석음을 지적하는 표현이며, 더 나아가서는 예수님의 사역을 모독하는 그들의 악행에 대한 책망이다.


24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If a kingdom is divided against itself, that kingdom cannot stand.

또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만일"이라는 단어는 24절, 25절, 26절에 걸쳐 등장한다. 24절과 25절의 "만일"에 해당하는 단어는 '에안'이고, 26절의 "만일"은 '에이'이다. 일반적으로 '에안'은 가정법 동사를 취하고, '에이'는 직설법 동사를 취한다. 다만 각각의 조건절을 이끄는 접속사의 동사가 과거형일 경우에 '에안'은 실현가능성 여부와 무관한 가정법을 나타내고, '에이'는 실현 가능성이 거의 없는 경우를 가정한다. 24절에서 나라가 분쟁하는 경우나 25절에서 집이 분쟁하는 경우는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에안'이 사용되었지만, 26절에서 사탄이 자기를 거스려 일어나 분쟁하는 경우는 전혀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에이'가 사용되었다.
24절부터 26절을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반복법과 점층법을 통해 자신의 논리를 분명하게 전달하셨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다. 첫째, 24절에서 '나라'에 해당하는 '바실레이아'와 25절에서 '집'에 해당하는 '오이키아', 이들 두 단어를 제외하면 24절과 25절은 완전히 일치 한다. 동일한 문구가 두 번 반복된 것은 예수님께서 서기관들의 말에 대한 답변을 강조하시기 위한 것이다. 둘째, '에안'과 '에이'의 차이점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궁극적으로 말씀하시려는 내용은 '에이'가 사용된 26절임을 알 수 있다. 당연한 내용의 비유 두 개를 거쳐 서기관들의 주장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도달하는 것이다.

"분쟁하면"에 해당하는 '메리스데'는 '나뉘어지면'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본문은 '스스로 나뉘어지면'으로 이해할 수 있다.


25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If a house is divided against itself, that house cannot stand.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
"스스로"에 해당하는 '에프 헤아우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다.
①'자발적으로'라는 의미이다.
(요한복음 5:19)
19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②'자신을 거스려'라는 의미이다.
'에프 헤아우텐'을 구성하는 '에프'의 원형인 '에피'는 '~에 대항하여'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헤아우텐'은 '자신을'이라는 뜻이므로 이는 '자신을 거스려'라는 뜻이 된다.
한글개역성경은 '에프 헤아우텐'을 24절과 25절에서는 '스스로'라고 번역한 반면, 26절에서는 '자기를 거슬러 일어나'라고 번역하여 일관성을 잃었다. 24절부터 26절은 반복법과 점층법을 통한 강조라는 목적이 있는 구문이므로 동일하게 번역하는 것이 의미 전달을 위해 더 효과적이다. 따라서 24절은 '또 만일 나라가 자기를 거슬러 일어나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로, 본 절은 '만일 집이 자기를 거슬러 일어나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고'로 번역하는 편이 더 좋을 듯하다.

 

26 만일 사탄이 자기를 거슬러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망하느니라
   And if Satan opposes himself and is divided, he cannot stand; his end has come.

만일 사탄이 자기를 거슬러 일어나 분쟁하면 설 수 없고 망하느니라
"망하느니라"는 사탄의 세력이 내부적으로 분쟁하는 경우에 대한 결론일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지금까지 예로 드셨던 나라(24절)와 집(25절)이 내부적으로 분쟁하는 경우에 대한 결론이기도 하다. 내부적으로 분쟁하는 경우에는 망하고 만다. 사탄의 세력은 우두머리인 사탄을 정점으로 하여 매우 유기적인 하나의 조직체를 형성하고 있으며, 하나님을 대적하려는 공동된 목적하에서 서로 긴밀하게 협력하므로 사탄의 세력이 서로 대적하여 충돌함으로 멸망을 자초할 리는 만무하다. 


27 사람이 먼저 강한 자를 결박하지 않고는 그 강한 자의 집에 들어가 세간을 강탈하지 못하리니 결박한 후에야 그 집을 강탈하리라
   In fact, no one can enter a strong man's house and carry off his possessions unless he first ties up the strong man. Then he can rob his house.


2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의 모든 죄와 모든 모독하는 일은 사하심을 얻되
   I tell you the truth, all the sins and blasphemies of men will be forgiven them.


29 누구든지 성령을 모독하는 자는 영원히 사하심을 얻지 못하고 영원한 죄가 되느니라 하시니
   But whoever blasphemes against the Holy Spirit will never be forgiven; he is guilty of an eternal sin."


30 이는 그들이 말하기를 더러운 귀신이 들렸다 함이러라
   He said this because they were saying, "He has an evil spirit."


31 그 때에 예수의 어머니와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Then Jesus' mother and brothers arrived. Standing outside, they sent someone in to call him.


32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어머니와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A crowd was sitting around him, and they told him, "Your mother and brothers are outside looking for you."


33 대답하시되 누가 내 어머니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Who are my mother and my brothers?" he asked.


34 둘러 앉은 자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내 어머니와 내 동생들을 보라
   Then he looked at those seated in a circle around him and said, "Here are my mother and my brothers!


35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Whoever does God's will is my brother and sister and mo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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