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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 마가복음

마가복음 1장

아리마대 사람 2017. 1. 21. 00:30

이 책의 헬라어 제목은 본래 '카타 마르콘(마가에 의한)'이지만 여기에 '기쁜 소식'을 뜻하는 단어가 덧붙여져서 영어 성경은 'The Gospel according to Mark', 한글 개역 성경은 '마가복음'이라는 제목이 붙여졌다.

이 책은 ' 마가에 의한 (복음서)'라고 불리지만, 이 책에 저자의 이름은 나타나 있지 않다. 저자가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가복음의 영향인지 다른 복음서의 저자들도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다. 마가를 비롯한 복음서의 저자들은 자기 자신을 드러내어 주목받기를 원한 것이 아니라 독자들이 예수님에게만 관심을 기울이고 바라보기를 원했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복음서에는 저자를 짐작할 수 있는 작은 흔적들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마가복음은 복음서 가운데 가장 먼저 기록되었다.

마가복음을 비롯한 신약성경의 거의 대부분은 먼저 말로써 전해졌고, 그 후에 말을 기록하는 방식으로 저술되었다. 그 때문에 문체는 구어체이고, 내용은 생동적이며 날 것 같고 거친 느낌이 있다. 말로써 전해진 내용이기 때문에 문법적으로 정확하지 않은 부분도 많다.

 

마가복음은 로마 등 비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을 대상으로 기록된 책으로 여겨진다. 마가복음에 기록된 풍습이나 관례등을 볼 때에 그렇고, 예수가 다윗의 후손이라는 족보가 없으며, 구약을 인용한 경우가 적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이러한 내용들은 본래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매우 중요한 내용이다.

마가복음을 기록한 사람은 마가이다.

마가의 로마식 이름은 '마르쿠스'이고, 유대인으로서의 히브리식 이름은 '요한', 곧 '요하난'이었다. 이는 재미 교포들이 영어이름과 한글이름을 모두 쓰는 것과 유사하다.

(사도행전 12:12)
12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

(사도행전 12:25)
25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하는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
(사도행전 15:37)
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마가라는 이름은 로마 사회에는 매우 흔한 이름이었다.

마가는 바나바의 조카였다.

(골로새서 4:10)
10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마가는 바나바, 바나바를 통해서 만난 바울, 로마에서 만난 누가, 그리고 베드로 등 초대교회의 기독교 지도자 네 명의 조력자로 활동했으며, 비록 초기 이방 전도의 핵심 인물은 아니었지만, 예루살렘 교회와 이방 교회들을 서로 연결시켜 주는 중요한 인물로서 활동했다.

마가는 바울과 삼촌인 바나바를 따라 제1차 전도 여행을 함께 했는데 밤빌리아 지방의 버가까지 동행한 후, 그 다음 목적지인 소아시아의 주요 지역 여행을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렸다.

(사도행전 13:13)
13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이에 대해서 청년 마가가 힘겨운 전도 여행에 적응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추정한다. 그래서 바울은 제2차 전도 여행 때 마가와 동행하기를 거부하여 바나바와 다투게 되었고,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거 구브로로 가서 전도했다.

(사도행전 15:37-39)
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그러나 위의 골로새서 4:10 말씀과 같이 바울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마가는 바울의 곁에서 위로가 되어 주었고, 바울의 동역자로서 바울에게 유익한 역할을 감당했다.

(디모데후서 4:11)
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빌레몬서 1:24)
24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그리고 누가를 돕기도 했다.

또한 마가는 베드로의 통역으로서도 활동했고 베드로의 설교를 기록하면서 베드로는 마가를 아들로 부를 정도로 친근하게 여기기까지 했던 것 같다.

(베드로전서 5:13)
13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마가복음의 경우, 처음에 사람들에 의해 ‘베드로의 복음서’로 불렸는데, 왜냐하면 베드로의 설교를 기록한 책이기 때문이다. 마가는 베드로가 예수님의 행적과 언행에 관해서 가르친 것을 충실히 기록했다고 한다.

베드로의 설교인 만큼 이 책에는 베드로의 특징들, 베드로의 솔직한 모습들이 담겨있다. 베드로는 자신의 실수와 잘못들을 드러내는 데에 주저하지 않으며, 자신에 대한 예수님의 칭찬은 언급하지 않는다. 또한, 성급하고, 가만히 있지 못하는 베드로의 성격이 잘 드러나 있다. 아울러 제자들의 솔직한 모습들도 담겨있다. 제자들의 어리석음과 믿음이 없음을 드러내는 데에 주저하지 않는다. 이러한 솔직한 모습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 공동체가 자리를 잡고 교회 내에서 제자들이 존중받는 지위가 되면서 점차 감추어진다. 다른 복음서에서는 마가복음과 같이 솔직하게 드러나지 않게 된다.

 

마가복음에서는 사건과 상황을 묘사하는 데 있어서 즉시(immediately, straightway, forthwith)라는 의미의 ""이라는 단어가 매우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다. 원문에서는 40번 가량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곧"이라는 단어가 이렇게 많이 사용된 까닭은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① 베드로의 성격이 성급하기 때문이다.

복음을 있는 그대로 빨리 전하고 싶은 마음이 나타나 있다. 

③ 예수님께서 매우 바쁘게 일하셨기 때문에 베드로가 이와 같이 표현할 수 밖에 없었다.

"곧"이라는 단어의 사용에 따라 장면과 상황이 생생하고도 극적으로 전달되어 숨도 안쉬고 급하게 말하는 베드로에게 공감하게 되는 특징이 있으며, 쉬지 않고 매우 바쁘게 일하신 예수님에게 감동하게 된다. 또한, "곧"이라는 단어가 대표하듯이 마가복음은 수사학적 기교나 설명, 배경 등에는 관심이 없고 매우 단도직입적이다.

또한, 한국어 번역본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그리고'라는 단어가 매우 빈번하게 사용되어 있다고 한다. 총 16장의 마가복음에서 555회 사용되어 있다고 한다. 이는 예수님의 행동만을 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여겨진다.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거의 나타나 있지 않고, 대부분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 통해서 베드로는 특별히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 곧 질병의 치료나 귀신을 내어쫓는 일 등에 관심이 많았음을 의미한다. 이 일들은 하나님의 아들(1:1)만이 하실 수 있는 일들, 곧 기적들이다. 예수님을 증거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직접적인 접근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마가복음은 구성 측면에서 예수님께서 이동하신 장소가 중요하다. 마가복음은 지중해보다 400m 낮은 해발 -400m의 땅으로서 지구에서 지표면이 가장 낮은 요단강에서 시작되어 갈릴리로 옮겨갔다가 이스라엘 땅에서 가장 높은 산인 헐몬산 자락의 가이사랴 빌립보 도상에서 베드로가 신앙고백을 하기까지 2년 반의 시간을 보내고(1장부터 9장까지), 신앙고백을 기점으로 하여 헐몬산으로부터 예루살렘을 향하는 6개월의 기간을 보낸 후(10장), 마침내 십자가와 부활에 도달한다(50일의 기간, 11장부터 16장까지).

마가복음이 예수님의 모든 행적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개략적으로 예수님께서 행하신 길을 파악할 수 있도록 구체적인 지명불특정 장소(회당, 집 등)를 표시해 두었고, 각 장에 나타난 경로를 지도 상에 대략적으로 표시해 두었다.

 

************ 마가복음 1장 ************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신 후 사역을 시작하시고 널리 알려지게 되신다.


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The beginning of the gospel about Jesus Christ, the Son of God.

마가는 책을 쓰는 데 있어서 특별한 서문없이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단도직입적으로 세례 요한의 활동을 기록하며 책을 시작한다. 이는 아브라함과 다윗으로부터 이어지는 족보를 소개함으로써 예수님을 구약에서 이미 예언된 정통 메시야로 소개하는 마태복음, 복음서를 기록하게 된 동기와 세례 요한의 출생부터 자세히 밝히는 누가복음, 헬라 철학의 용어를 사용하여 예수님의 신적 위상을 높이는 요한복음의 시작과 비교된다. 초대 교회의 전승에 따르면 마가복음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을 1차 수신자로 삼고 로마에서 작성되었다고 하는데, 행동을 중시하여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으로 들어가기를 좋아했던 로마인의 성향이 반영되어 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마가는 자신을 밝히거나 특별한 서문을 기록하는 대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하며 마가복음을 시작한다. 이것이 마가복음의 주제이고, 마가복음을 기록한 목적이기도 하다.

이는 또한 족보나 배경 설명 등이 필요하지 않은 이유를 알려준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마가복음은 베드로의 설교를 기반으로 한 기록이므로 베드로의 고백으로부터 시작된 것일 수도 있다.

(마태복음 16:16)
16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은 마가복음에서 너무나 중요하여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다'라는 선언이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 곧 세 번에 걸쳐 등장한다. 이는 중요한 것을 강조하기 위한 방법이다.

맨 처음의 선언은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는 것이다.

(마가복음 1:11)

11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중간의 선언은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난다.

(마가복음 9:7)

7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마지막 선언은 이스라엘을 점령한 국가인 로마의 백부장의 고백으로서, 곧 이방인인 로마의 군대 장교의 입을 통한 소리로서 나타난다. 하늘이 아닌 땅에서 소리가 나는 것이다. 

(마가복음 15:39)

39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이 구절은 본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아르케 투 유앙겔리우 이에수 크리스투 휘우 테우)"이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것이 복음임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호칭과 관련해서는 두 가지 의견을 찾아볼 수 있다.

①로마시대 당시에는 황제나 영웅, 뛰어난 예술가 등을 '신의 아들'로 불렀기 때문에 단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만 기록했다면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명확하게 전달하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예수님이며 그 분이 그리스도이심을 명확하게 기록하고 있다.

②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선언은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선언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은 로마 제국의 황제를 가리키는 호칭이었기 때문이다.

한편, 흥미로운 점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언을 더러운 귀신들도 하고 있다는 점이다. 

(마가복음 3:11)

11 더러운 귀신들도 어느 때든지 예수를 보면 그 앞에 엎드려 부르짖어 이르되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 하니
(마가복음 5:7)

7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하니

이는 앞부분에서 두 번만 등장한다. 귀신들의 증언은 온전하지 않기 때문으로 이해된다.

"복음"은 '복된 소식'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로마 세계에서 이 단어는 본래 황제의 즉위나 전쟁에서의 승리의 소식 등을 가리키는 단어였다. 신약성경에서는 이 단어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사역, 죽음, 부활, 승천하신 사역과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따르는 자들에게 주시는 구원의 소식'이라는 의미를 가리킨다.

시작이라

여기서 "시작"은 헬라어로 '아르케'이며, 헬라어 성경에서는 마가복음의 맨 처음에 등장하는 단어이다.

이는 성경의 첫 단어이기도 하다. 성경의 첫번째 책인 창세기의 맨처음 단어인 '태초에'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베레쉬트'가 헬라어 구약성경인 70인역에서 '엔 아르케'로 번역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요한복음에 기록된 '태초에'와 동일한 단어이기도 하다. 

(요한복음 1:1)
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는 복음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마치 창세기와 같이 표현한 것이다. 즉, 예수님의 구원 사역이 하나님의 천지창조와 연결되는 인류 구원의 재창조 사역임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시작"의 의미는 마가가 쓴 이 글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이고, 이제 복음의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구성 측면의 선언이며, 또한 마가가 이 글을 기록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이 이후의 역사 동안 전 세계에 널리 전파되기 시작했다는 역사적 측면의 선언이기도 하다.


2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그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It is written in Isaiah the prophet: "I will send my messenger ahead of you, who will prepare your way"--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의 족보나 탄생 이야기가 완전히 생략되어 있고, 2절부터 8절까지는 세례 요한의 등장과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그의 사역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2-3절: 이사야의 예언의 인용

4-5절: 이사야의 예언에 따른 세례 요한의 출현과 사역

6절: 선지지로서의 세례 요한의 모습

7절: 세례 요한의 메시야 출현 예언

이처럼 세례 요한의 사역을 기록함에 있어서도 메시야의 출현을 예고하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

마가복음은 가장 먼저 이사야의 글, 곧 구약을 인용하면서 시작한다.

선지자 이사야의 글에는 하나님의 종이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고, 자기 백성들의 죄를 위해 죽임을 당하고, 죽음에서 일어나 높여질 것이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이사야의 글은 '제5복음서'라는 별명을 갖고 있기도 하다. 

이처럼 구약의  이사야를 인용한 것은 예수님의 출현을 선포하는  세례 요한을 증거하기 위함이다.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네 앞에 보내노니 저가 네 길을 준비하리라

이 말씀은 이사야의 글이라기보다 출애굽기 및 주로 말라기의 말씀을 참고해야 할 것이다.

(출애굽기 23:20)
20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 길에서 너를 보호하여 너를 내가 예비한 곳에 이르게 하리니

(말라기 3:1)
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보라 내가 내 사자를 보내리니 그가 내 앞에서 길을 준비할 것이요 또 너희가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니 곧 너희가 사모하는 바 언약의 사자가 임하실 것이라

이 말씀이 마태복음에 인용됨으로써 이 말씀은 세례 요한이 보냄을 받게 됨을 가리키는 말씀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세례 요한의 출생과 사명은 이미 오래 전, 적어도 이사야의 때부터, 그러기 위해서는 태초부터 예정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일하심을 보여준다. 

이 말씀은 내용상 다음의 3절에 나타난 이사야의 글과 동일하므로 앞에서 이를 뭉뚱그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이라고 말하였다.

여기서 "앞에"라는 말에 해당하는 '프로소푸'는 전쟁에서 승리한 개선장군이 돌아오기 전에 선발대를 먼저 보내어 승리의 소식을 알렸던 것과 관련된 단어이다. 이로부터 "저가 네 길을 예비하리라"라고 기록된 세례 요한의 역할은 메시야의 오심을 위해 특별한 사역을 했던 것이라기보다는 단지 메시야가 오신다는 기쁜 소식을 사람들에게 전하여 그들이 준비되도록 하는 것에 한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3절과 같이 그는 단지 "소리"였던 것이다.

 

3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기록된 것과 같이
  "a voice of one calling in the desert, 'Prepare the way for the Lord, make straight paths for him.'"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이사야에 기록된 말씀은 다음과 같다.

(이사야 40:3)
3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는 세례  요한이며, 여기서 광야는 사해와 얍복강과 요단강 합류 지점 사이에 있는, 사람이 살지 않는 '유대 광야'를 가리킨다. 이사야에 기록된 광야는 바벨론 포로 시대를 살고 있는 유대인들의 피폐한 영적 상황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쳤기 때문에 그 어떤 것의 영향도 받지 않았고, 그 어떤 제약으로부터도 자유로웠으며,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았다. 그래서, 4절과 같이 담대하게 '회개의 세례'라는 메세지를 전파할 수 있었다.

이 사명을 감당하는 자로서 세례 요한은 단지 "소리"였다. 그래서 그는 "광야에 외치는 자"조차 아닌, 단지 '소리'에 불과한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였다. 그는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오로지 외치는 자의 '소리'로서 소리의 형태로서 전달되는 메세지만로서만 기능했다. 그래서, 7절과 같이 자신을 온전히 낮추어 메세지를 전파할 수 있었다.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주님께서 오시는 길은 곧게 다듬어진 길이어야 한다.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사람으로서 이 땅에 오셔서 사역을 하시는 기간은 정해져 있다. 예수님이 오시는 길이 곧게 다음어져 예수님의 사역이 준비되어 있을 때,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섭리가 효율적으로 이루어진다.

또한 예수님이 오시는 길이 곧게 다듬어져 예수님을 맞이할 준비되어 있을 때, 우리가 예수님을 알아볼 수 있다.

기록된 것과 같이

헬라어에서는 이 구절이 2절의 맨 처음에 기록되어 있지만, 우리말로 번역하는 과정에서 3절 맨 끝에 기록되었다.

"기록된 것"으로 번역된 '게그랍타이'는 완료수동태로서 과거에 이루어진 사건의 영향이 현재까지 지속되는 것을 나타내는 완료형과 신적 수동태가 결합된 형태이다.

"~과 같이"로 번역된 '카도스'는 '따라서(according to)'라는 의미이다.

이로부터 이 구절은 '과거에 하나님에 의해 기록되었던 것에 따라서 현재에~'라는 의미가 된다. 이는 세례 요한이 행하는 모든 일들은 우연이 아니라 철저하게 과거에 하나님께서 주신 예언의 말씀을 따라 이루어지고 있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4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And so John came, baptizing in the desert region and preaching a baptism of repentance for the forgiveness of sins.

세례 요한이 광야에 이르러

"세례 요한이 이르러"는 세례 요한의 출생과 성장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이에 관해서는 누가복음을 참고할 수 있다.

누가복음은 하나님의 사자로서 보냄을 받은 세례 요한이 태중에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고 기록했다.

(누가복음 1:15)
15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또한, 누가복음은 요한이 준비되는 성장 과정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누가복음 1:80)
80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세례 요한은 자라는 동안 심령이 강하여지고 담대해졌으며 빈 들에서 지내는 동안 기도를 통해 성령으로 충만해졌고, 이를 통해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사자로서의 사명을 행할 준비를 갖추고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나타난 것이다.

세례 요한은 이사야에 기록된 대로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의 역할로서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고, 예수님의 길을 평탄하게 하는 사명을 수행했다(3절).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

세례 요한이 전파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가 이사야에 기록된 '외치는 자의 소리'로서 전한 메세지이다. 세례 요한은 회개를 통해 부정한 것을 깨끗하게 만들어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감당한 것이다.

마태복음을 참고하면, "회개"와 관련된 세례 요한의 대표적인 메세지는 다음과 같다.

(마태복음 3:7-10)
7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9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10 이미 도끼가 나무 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죄사함)을 받게 하는"에 해당하는 '에이스'는 목적을 나타내는 전치사이며, 영역본 성경들에서는 '(죄사함)을 위한'으로 번역되었다. 따라서 이 구절은 ' 죄 사함을 위한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니'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보면 세례 요한이 전한 회개의 세계는 죄 사함의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죄 사함으로 안내하고 이끌기 위한 '소리'의 역할만을 했음을 보다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회개"에 해당하는 '메티노이아스'의 원형인 '메티노이아'는 동사형이 '메타노에오'이고, 여기서 '메타'는 '다르게'라는 의미이고, '노에오'는 '생각하다'라는 의미이다. 즉 회개란 본래 '다르게 생각함'이라는 의미이다. 이는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에서 마음과 생각을 다르게 바꾸는 것, 그리고 이의 결과로서 행위의 변화까지 이끌어냄을 의미한다. 보다 뚜렷한 의미는 히브리어를 통해서 알 수 있다. '회개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 '슈브'는 '인간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 돌이키다'라는 의미이다. 이러한 의미는 3절과 4절의 광야라는 "단어"를 만날 때, 아스라엘 백성들과 하나님이 언약 관계를 맺은 최초의 장소인 시내광야로 돌이킨다는 의미를 생성하며, 이는 구약의 회개의 의미를 복음서로 이끌어 온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세례'에 해당하는 '밥티스마'는 '담그다'는 뜻의 동사 '밥티조'에서 파생되었으며, 이는 몸을 완전히 담그는 동작을 가리킨다. 당시에는 유대교로 개종한 이방인을 물 속에 담그는 의식으로서의 세례가 있었을 뿐이지만, 요한의 세례는 그와 달리 자신의 죄를 깨닫고 뉘우치게 하는 세례였다.


5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The whole Judean countryside and all the people of Jerusalem went out to him. Confessing their sins, they were baptized by him in the Jordan River.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유대 지방은 예전 남유다 왕국의 영토를 가리키며, 예루살렘이 유대 지방에 위치하고 있었다. 세례 요한이 활동한 광야는 유대 지방에 위치하고 있었다.

여기서 "온"에 해당하는 '파사'와 "다"에 헤당하는 '판테스'는 모두 '파스'가 원형인 형용사이며, 여성 단수형과 남수 복수형이라는 점만 다를 뿐이다. 이 단어들은 '모든'을 의미하는데, 이는 일종의 과장법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층, 신분, 직업과 상관없이 다양한 사람들이 세례 요한에게 나왔음을 알려준다. 이는 B.C. 400년 무렵 활동한 말라기 이후로 수 백년 동안 선지자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며, 당시의 대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과 같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로부터 영적인 가르침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나아가"에 해당하는 '엑세포류에토'는 미완료 과거 3인칭 단수형으로서 완료되지 않고 과거에 계속되던 동작을 나타낸다. 즉, 이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례를 받기 위해 줄을 지어 세례 요한에게 나오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강한 심령을 가진 세례 요한의 외침은 회개로 인도하는 능력이 있었다. 이 능력은 그가 주의 길을 예비하는 사명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주어진 것이다. 주의 길을 예비하기 위해서는, 곧 당시에는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그리고 오늘날에는 심령에 찾아오시는 예수님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회개의 세례'를 통해 정결해지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서, '회개'는 자신의 죄와 잘못을 깨닫고 후회하고 뉘우치는 정도의 것이 아니라, 삶의 모습과 방식을 완전히 바꾸는 것이다. 회개의 삶에 관한 세례 요한의 구체적인 가르침이 누가복음에 나타나 있다.

(누가복음 3:10-14)
10 무리가 물어 이르되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11 대답하여 이르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12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13 이르되 부과된 것 외에는 거두지 말라 하고
14 군인들도 물어 이르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이르되 사람에게서 강탈하지 말며 거짓으로 고발하지 말고 받는 급료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6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John wore clothing made of camel's hair, with a leather belt around his waist, and he ate locusts and wild honey.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4절에 기록된 '광야에서'의 생활방식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말씀이다. 요한은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로서 오로지 주의 길을 예비하는 데에만 관심을 가졌다. 따라서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매었을 뿐이었고, 입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 복장은 세례 요한의 광야 생활을 보여주는 동시에 사명에 대한 헌신을 나타낸다.

"낙타털 옷"은 '낙타털로 짠 옷'을 의미한다.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라는 복장의 설명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세례 요한의 이미지를 엘리야의 이미지와 선명하게 연결짓는 역할을 한다.

(열왕기하 1:8)
8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되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더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그는 디셉 사람 엘리야로다

열왕기하 1장에서 아합의 후계자 아하시야가 자기 병을 고치기 위하여 에글론의 지방신인 바알세불에게 자기가 언제 회복될 것인지 물어 보라고 사신을 보냈는데, 사신이 돌아와서 말하기를 가는 도중에 털옷을 입고 가죽 허리띠를 두른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이 왕은 결코 회복되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했다고 전하자 이하시야는 그가 '디셉 사람 엘리야'임을 금새 알았다. 이 이야기에서 나타나 있듯이 아하시야 당시에도, 또한 그 이후에도 엘리야는 '털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띤 사람'인 것이다. 세례 요한의 모습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엘리야를 떠오르게 했다. 세례 요한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전파한 제2의 엘리야였으며, 2-3절과 같이 말라기와 이사야에서 예언된 새로운 엘리야였다.

이 사실은 예수님께서 확인해주신 것이기도 하다.

(마태복음 11:13-14)
13 모든 선지자와 율법이 예언한 것은 요한까지니
14 만일 너희가 즐겨 받을진대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

(마가복음 9:13)
13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엘리야가 왔으되 기록된 바와 같이 사람들이 함부로 대우하였느니라 하시니라

또한 이 사실은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가랴에게 천사가 전해준 말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누가복음 1:17)
17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

이 말씀은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먼저 와서 백성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는 선지자 엘리야를 기록한 말라기의 말씀과 연결된다.

(말라기 4:5-6)
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6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

유대인들은 엘리야가 먼저 온 후에 그리스도가 오실 것이라고 알고 있었다.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이 또한 4절에 기록된 '광야에서'의 생활방식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말씀이다. 요한은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로서 오로지 주의 길을 예비하는 데에만 관심을 가졌다. 따라서 메뚜기와 석청을 먹었을 뿐이었고, 먹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았다. 세례 요한이 먹은 음식은 그의 광야 생활을 보여주는 동시에 사명에 대한 헌신을 나타낸다.

당시 사람들이 단백질 섭취 수단으로서 작은 곤충을 먹기도 했는데, "메뚜기"는 레위기에서 허용되는 먹을 수 있는 곤충이었으므로 가난한 사람들이나 먹을 것이 없는 사람들이 먹곤 했다.

(레위기 11:21-22)
21 다만 날개가 있고 네 발로 기어다니는 모든 곤충 중에 그 발에 뛰는 다리가 있어서 땅에서 뛰는 것은 너희가 먹을지니
22 곧 그 중에 메뚜기 종류와 베짱이 종류와 귀뚜라미 종류와 팥중이 종류는 너희가 먹으려니와
석청은 포도주를 대신하는 역할을 했다. 세례 요한이 떡과 포도주 대신 메뚜기와 석청을 먹고 지냈던 사실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누가복음 7:33)
33 세례 요한이 와서 떡도 먹지 아니하며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매 너희 말이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이처럼 메뚜기를 '누런 녹색 또는 누런 갈색의 몸을 가지고 있고 뒷다리가 발달하여 잘 뛰는 곤충'으로 생각할 수 있고, 석청을 '산속의 나무나 돌 사이에 벌이 모아 놓은 꿀'로 생각할 수 있지만, 당시의 유대 땅의 환경을 생각할 때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메뚜기"와 관련하여 이스라엘에는 두 종류의 메뚜기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우리가 알고 있는 곤충인 메뚜기이며, 또 하나는 메뚜기라고 불리는 나무이다. 메뚜기는 히브리어로 '하루브(harub)'인데, 쥐엄나무도 같은 '하루브(harub)'였으므로 이를 메뚜기 나무라고 불렀다.

 

쥐엄나무 열매

쥐엄나무 열매는 처음에는 단맛이 나지만 끝맛이 몹시 떫고 텁텁하여 식용으로는 잘 사용하지 않았는데, 쥐엄나무 열매에 관해서는 유대인들만의 특별한 이미지가 있다. 쥐엄나무 열매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가난하고 궁핍할 때 먹는 열매로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게 말하자면 보릿고개 때의 소나무 껍질이나 풀뿌리와 같은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다. 누가복음 15장에서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이 굶주렸을 때, 쥐엄나무 열매를 먹으려 했다.

(누가복음 15:16)
16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즉, 세례 요한이 먹었던 "메뚜기"는 당시 가장 가난하고 궁핍할 때 먹던 쥐엄나무 열매를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

"석청"과 관련하여 이를 '나무나 돌 사이에 벌이 모아 놓은 꿀'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운 점이 있는데, 세례 요한이 활동하던 광야는 꽃이 자라지 않는 곳이었으므로 벌도 없고 꿀도 없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석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스라엘에서 말하는 '꿀'에 관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에는 세 종류의 '꿀'이 있다. 첫번째는 우리가 알고 있듯 벌꿀이 있고, 두번째는 종려나무 꿀이며, 세번째는 쥐엄나무 꿀이다. 이 세가지의 꿀 중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사용했던 꿀은 종려나무의 열매로 만든 종려나무 꿀이다.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언급되는 '꿀'은 종려나무 꿀로 생각해도 무방하다. 석청은 유대인들의 율법을 통해서 이해할 수 있다. 유대인들에게는 '모퉁이'라는 뜻의 '페아(peah)'법이 있다. 하나님께서 명하신 바에 따른 구제법으로서 가난한 자들과 거류민을 위해 곡식을 거둘 때에 밭 모퉁이를 베지 않고, 떨어진 이삭을 줍지 않는 규정이었다.
(레위기 19:9-10)
9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 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10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이는 곡식 뿐만 아니라 모든 과일나무에도 적용되었기 때문에, 유대인들은 과일나무의 과일을 거둘 때에도 일정 분량은 남겨놓았으며, 과일나무에서 떨어진 것은 줍지 않고 내버려 두어서 가난한 사람들이 주워갈 수 있게 했다. 룻이 시어머니 나오미를 봉양할 수 있었던 것도 페아법에 따라 밭에서 곡식의 이삭을 주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룻기 2:2-3)
2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하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갈지어다 하매
3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
이와 같이 당시의 농부들은 추수 기간 동안 종려나무의 열매인 대추야자의 일정 분량을 거두지 않고 남겨두었는데, 추수 기간이 지나면 열매들이 땅바닥이나 돌 틈에 떨어졌고, 가난한 사람들이 이를 주울 수 있었다. 즉, 세례 요한이 먹었던 "석청"은 종려나무의 열매가 떨어져 돌 틈에 끼어 있던 것으로서 가난한 사람들이 주워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을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

이처럼  유대 땅의 환경을 생각할 때,  "메뚜기와 석청"은 가난한 사람들이 먹던 쥐엄나무 열매와 돌 틈에 끼어있던 종려나무 열매를 가리키는 것일 수 있다.

세례 요한은 극도로 청빈한 삶을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생각할 수 있다. ①유대인 사회에서는 평범한 개인도 특별한 수양이나 극도의 회개를 위해서 고행을 하는 경우가 있었다. ②세계 요한은 하나님께로부터 구체적인 소명을 받기 전까지 극도의 경건주의, 신비주의 공동체였던 엣세네파나 쿰란 공동체의 일원이었을 수가 있다. ③자신의 사명에 따라 의도적으로 이러한 삶의 방식을 선택했을 수 있다.

세례 요한은 진정으로 광야에서, 진정으로 가난한 상황에서, 진정으로 자신의 사명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만을 전파하던 하나님의 종이며 선지자였다.

 

7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And this was his message: "After me will come one more powerful than I, the thongs of whose sandals I am not worthy to stoop down and untie.

최초의 복음서인 마가복음은 세례 요한의 선포로부터 예수님의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세례 요한은 구약의 예언을 따라 예수님의 오심을 선포하는 역할에만 머물러 있고, 그의 가르침의 상세한 내용은 나타나 있지 않다. 마가복음에 기록되어 있는 세례 요한의 선포의 내용은 예수님의 오심을 선포하는 7-8절이 전부이다. 그러나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는 세례 요한이 가르친 내용이 보다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고,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증거하는 요한의 선포가 보다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이것은 이사야에 기록된 '주의 길을 예비하라 그의 첩경을 평탄케 하라'는 말씀의 성취이다. 세례 요한은 자신을 낮추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심을 알렸다. 이것은 6절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의 앞에 와서 사람들의 마음을 돌이켜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하는 엘리야의 사명이다. 그래서 그는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라고 전파했던 것이다.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에 해당하는 '이스퀴로테로스'의 원형 '이스퀴로스'는 '강한'으로 번역된다. 이는 물리적 힘이나 세상의 권세가 아닌 영적인 면에서의 힘과 권세를 의미한다. 예수님은 온 우주 만물이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는 권세를 가진 분이시다.

(히브리서 2:8)
8 만물을 그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셨느니라 하였으니 만물로 그에게 복종하게 하셨은즉 복종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야 하겠으나 지금 우리가 만물이 아직 그에게 복종하고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오시나니"에 해당하는 '에르케타이'는 직설법 현재 동사로서 '지금 오고 계신다'는 의미이다. 세례 요한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였다. 

(누가복음 3:2)
2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 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한지라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종말론적 역사관에 입각하여 그분이 자신의 뒤에, 지금 오고 계시다는 사실을 생동감있게 전하고 있다. 

(마태복음 3:1-2)
1 그 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세례 요한은 철저하게 자신을 낮추어 그리스도의 길을 예비했다. 자신을 '몸을 굽혀 그 분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할 존재'로 낮춤으로써 그리스도를 높였다. 세례 요한의 말은 그리스도의 존귀하심에 대한 경배를 나타낸 것이었다.

"신들메를 푼다"는 표현은 고대 근동 지방의 사회적 풍습과 관련된 것이다. 주인이 밖에서 돌아오면 종이 주인의 발에서 신발 끈을 풀고 발을 씻겼다. 이는 종들이 하는 일 중에 가장 비천한 일이었다. 랍비의 교훈 중에는 '학생은 종이 주인에게 하는 것처럼 스승에게 해야 한다. 그러나 종이 주인의 신들메를 푸는 일은 제외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이다. 이처럼 세례 요한은 극도로 자신을 낮추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없다고 그를 높여주셨다.

(마태복음 11:11)
11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세례 요한보다 큰 이가 일어남이 없도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예수님께서도 낮춤의 모습을 친히 보여주셨다. 유월절 저녁식사 자리에서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시고 수건으로 닦아주신 것이다.

(요한복음 13:4-5)
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5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존귀하신 예수님께서 죄인인 사람들에 대한 사랑을 직접적으로 보여주신 것이었다.

(요한복음 13:1)
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높이셔서 임금과 구주,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다.

(사도행전 5:30-31)
30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31 이스라엘에게 회개함과 죄 사함을 주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로 삼으셨느니라

(에베소서 1:22)
22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8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I baptize you with water, but he will baptize you with the Holy Spirit."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세례 요한이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알고 전할 수 있었던 것은 요한을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게 하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알려준 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33)
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세례 요한이 베푼 "물 세례"는 죄를 깨닫고 뉘우치게 하는 세례였고, 예수님이 베푼 "성령 세례"는 죄사함을 통해 새 생명을 얻고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게 하는 세례이다.  세례 요한이 사자로서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의 앞에 보냄을 받고 물로 세례를 베풂으로써 예수님의 길을 준비한 것은 "물 세례"를 통해 죄를 깨닫고 뉘우친 후에 "성령 세례"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회개는 성령 임재의 시작인 것이다. (참고)


9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At that time Jesus came from Nazareth in Galilee and was baptized by John in the Jordan.

그 때에

좁게는 7-8절에서, 넓게는 2-8절에서 세례 요한을 통해 예고된 예수 그리스도께서 등장하신다. 

본절은 번역되지 않은 '카이 에게네토'로 시작한다. 이는 직역하면 '그리고 ~가 되었다'라는 의미이다.  "그 때에"에 해당하는 '엔 에케이나스 타이스 헤메라이스"는 직역하면 '그 날들 안에'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그 때에"라는 말은 본래 '그리고 그 날들이 되었다'라는 의미를 지닌 것이다. 이는 기대감을 높이며 드디어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게 되었음을 알리는 의미이다.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마가복음은 세례 요한이 자신의 사명을 따라 그리스도의 오심을 전파하기 시작한 이후에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지점부터 기록을 시작하고 있다. 즉, 마가복음은 대략 예수님의 30세부터 기록을 시작한 것이다.

또한 마가복음은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 등의 다른 공관복음서와 달리 예수님께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서 40일 동안 시험을 받으시는 사역 준비 과정을 9-13절까지의 단 5절만으로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다.

마가복음이 베드로의 설교를 기록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 때부터 기록이 시작된 이유는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① 베드로는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 탄생과 성장과정에 대해 잘 알지 못했거나 관심이 없었다.

② 베드로는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 탄생과 성장과정은 복음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생각했다.

③ 베드로는 예수님의 사역준비 과정보다는 실제 사역만을 빨리 전달하고자 했다.

예수님께서는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셨지만,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 30년 동안 사신 곳은 "갈릴리 나사렛"이다. 갈릴리 지역은 갈릴리 호수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으로서 유다, 사마리아, 베레아와 더불어 로마가 이스라엘을 지배하면서 나눈 4대 행정구역 중의 한 곳이었다. 갈릴리는 이사야에서 메시야가 등장할 것으로 예언된 곳이기도 했다.

(이사야 9:1-2)
1 전에 고통 받던 자들에게는 흑암이 없으리로다 옛적에는 여호와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후에는 해변 길과 요단 저쪽 이방의 갈릴리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요단 강에서"에 해당하는 '에이스 톤 이오르다넨'은 '요단강 안에서'라는 의미이다. 당시의 세례 요한의 세례가 요단강 내부에서 이루졌음을 알려준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영광의 하나님이시며, 회개할 것이 없고 죄가 없는 분이시기 때문에 세례를 받을 필요가 없으셨지만, 죄인인 인간들과 동일하게 세례를 받는 겸손함을 지니셨고, 완전한 인간으로 오셨다.


10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As Jesus was coming up out of the water, he saw heaven being torn open and the Spirit descending on him like a dove.

이 표현은 베드로의 급한 성격을 드러내는 동시에 장면과 장면 사이의 긴박한 사건 전개와 긴장된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강조함으로써 설교를 듣는 사람들에게 생생한 감동을 전하는 표현이다.

여기서도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신 후에 일어날 일에 대해서 긴장감을 느끼게 하며 기대를 갖게 한다.

물에서 올라오실새

"물에서"에 해당하는 '에크 투 휘다토스'는 '물로부터'라는 뜻이다. 9절의 "요단 강에서"와 연결되는 표현이다.

누가복음에 따르면 이 때에 예수님께서는 기도하셨고, 이 기도 가운데 놀라운 현상들이 나타난다.

(누가복음 3:21)
21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하늘이 갈라짐과 

"하늘"에 해당하는 '투스 우라누스'는  복수형이며 '그 하늘들'을 의미한다. 이는 하늘이 삼층천으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의 우주관에 기인한 표현이다.

"갈라짐"에 해당하는 '스키조메누스'의 원형인 '스키조'는 '찢다, 가르다'의 의미로서 성소의 휘장이 찢어졌다는 말과 동일하다.

(마가복음 15:38)
38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이는 마태나 누가가 '열다'라는 의미를 지닌 '아고이노'를 사용한 것과 달리 세례 이후에 하늘에 나타난 현상을 극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또한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심으로 사역을 시작하실 때 나타난 하늘의 갈라짐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사역을 마치실 때 나타난 성소 휘장의 찢어짐을 연결지으며 크고 놀라운 현상이 나타났음을 극적으로 표현한다.

(마가복음 15:37-38)
37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38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성경에서 하늘이 갈라지는 현상은 주로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를 나타내기 위한 묵시적 표현이다. 따라서 이 현상은 당시의 시대에만, 혹은 요단강 지역에만 의미있는 사건이 아니다. 이는 모든 인류의 역사에서, 그리고 온 우주에 있어서 의미있는 구속의 대사건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세상과의 교제를 허락하심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다.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비둘기)같이"에 해당하는 '호스'는 '~처럼'이나 '~로서'라는 의미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성령의 강림을 분명히 보셨다는 것이며, 비둘기를 성령으로 여겼다거나 노아의 홍수에 나오는 비둘기처럼 새로운 시대를 상징한다거나 페르시아와 애굽 전승에 등장하는 왕을 세우는 신적 능력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물에서 세례를 받으신 후 성령이 비둘기같이 예수님에게 내려오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분이라는 증거이며, 이는 요한이 전달받은 계시이다.

(요한복음 1:33)
33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베풀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예수님께서는 물 세례와 함께 성령 세례를 받으심으로써 완전한 세례의 모범을 보여주셨다.

영지주의는 이 구절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영이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동안에만 임했다가 십자가에서 죽기 전에 떠났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11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And a voice came from heaven: "You are my Son, whom I love; with you I am well pleased."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하늘)로서"에 해당하는 '에크'는 '~로부터'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이는 소리가 하늘로부터 울려나오는 초자연적인 광경을 현장감있게 표현하고 있다. 또한 직접적으로 예수님이 누구신지, 곧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아들이며 하나님이 기뻐하는 분이심을 증거하는 음성이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하늘로부터 직접적으로 들렸음을 명확히 밝힘으로써 선포되는 내용이 하나님의 계시임을 강조한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는 현재 직설법이다. 이는 하나님과 예수님의 관계를 정확하게 기술하는 구절로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영속적이라는 사실을 나타낸다.

"기뻐하노라"에 해당하는 '유도케사'는 '유도케오'의 부정과거 직설법이며, '유도케오'는 '기뻐하다', '동의하다', '결정하다'라는 의미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메시야로 세우시고 이 땅에 보내신 일이 오래 전에 계획되었고 결정되었다는 의미이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세례는 이를 확인하는 절차로서의 의미도 지닌다.

이처럼 예수님의 사역의 시작은 "(예수님이) 내 사랑하시는 아들"이라는 하나님의 증언이 함께 한다. 그리고, 예수님의 사역의 끝, 곧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에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백부장의 고백이 함께 한다.

(마가복음 15:37-39)
37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숨지시니라
38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니라
39 예수를 향하여 섰던 백부장이 그렇게 숨지심을 보고 이르되 이 사람은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율법에 따르면 한 사람의 증언만으로는 효력이 없다. 두 사람 이상의 증인이 있어야 증언이 인정된다. 예수님의 사역의 시작과 끝에 선언된 두 번의 증언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한 명백하고 유의미한 증언이다.


12 성령이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At once the Spirit sent him out into the desert,

성령이

예수님께서는 물에서 세례를 받으신 후 비둘기같이 내려오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셨고 성령의 인도를 따라 행하셨다.

"곧"에 해당하는 '카이 유뒤스'는 실제로는 '그리고 곧' 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는 바로 앞 절의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사건과 본 절에서 말하는 광야의 시험이 깊은 관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예수님께서 쉴새없이 부지런히 일하셨음을 나타낸다.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성령은 평탄한 길로만 인도하시지 않는다. 고난의 길로, 시험의 길로 인도하시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유익을 얻게 하려는 하나님의 뜻을 따른 것이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성령의 인도를 따라, 또한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증언해주시는 하나님과의 교통 속에서 광야로 가셨다.

이 광야의 위치에 대해서는 ① 모세가 40일 금식을 했던 시내산 ②외경에 기록된 다볼산 ③여리고 북서쪽 5km 거리의 산 등으로 추측이 가능하다. 그 중에서 세례를 받으신 곳과 멀지 않았으리라는 생각에서 ③이 타당하다는 의견이 많다. 이 곳은 '콰란타니아 산' 또는 '제벨 콰란툴'로도 알려져 있다. 두 이름 모두 40일을 의미하는 라틴어 단어인 '콰렌테나'의 발음 오류에서 유래되었다.

정확한 위치는 불명확하지만, 당시 유대인들에게 광야는 사람이 살지 않는 황폐한 곳, 타인과의 교제가 없는 고독한 곳, 의지할 것이 없고 짐승들이나 귀신들이 주로 거주하는 장소였다.

세례 요한도 빈 들, 곧 광야에서 자랐고 광야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누가복음 1:80)
80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

예수님께서도 세례 요한과 마찬가지로 광야에서 사역을 준비하셨다.

"(광야)로"에 해당하는 '에이스'는 '안으로'라는 의미이다.

"몰아내신지라"에 해당하는 '에크발레이'는 직설법 현재 동사로서 '그가 내던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이 단어는 마태가 사용한 '아네크데', 즉 '그가 이끌리어 가사'와 누가가 사용한 '에게토', 즉 '그가 이끌리시며'에 비해 훨씬 역동적인 뉘앙스를 준다.

이로부터 "광야로 몰아내신지라"는 '그가 그 광야 안으로 내던지고 있다'라는 의미가 된다. 이는 성령이 예수님을 사람들과 단절된 고립의 상태로, 아무 것도 의지할 수 없는 곳으로 강권적으로 내던져서 홀로 외롭게 시련을 이기며 공생애 사역을 준비하게 한 것을 의미한다.


13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and he was in the desert forty days, being tempted by Satan. He was with the wild animals, and angels attended him.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의 기록과 달리 마가복음은 예수님이 겪으신 광야에서의 시험을 12-13절, 단 두 절로 기록했다. 다른 복음서들은 '사탄에 대한 예수님의 승리'라는 주제로 독립시켰지만, 마가복음은 이후의 공생애 기간 동안 반복될 사탄과의 대결의 시작이라는 관점에서 기록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시면서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셨는데, "사십"이라는 숫자는 유대인들이 땅의 숫자로 생각했던 '4'와 하늘의 숫자로 생각했던 '10'을 곱한 수로서 유댜인들에게 있어서는 '어떤 일을 준비하는 기간'을 상징하는 수이다. 성경에서 "사십"은 주로 고난의 기간들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노아 시대에 홍수로 심판하시면서 사십 주야 동안 세상에 비를 내리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이후에 광야에서 사십 년간 방황했다.

모세는 금식하면서 사십 일 사십 야를 시내산 위에 있었다.

리야는 광야에서 사십 주 사십야를 걸어 호렙산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 기간은 고난으로만 가득한 기간들이 아니었다. 이 기간은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위한 준비기간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 의미는 구약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라 할 수 있는 출애굽 사건을 통해 가장 명확하게 드러난다.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40년을 지냈다. 광야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광야가 어떤 곳인가를 생각해 보아야 하며,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통해 이를 배울 수 있다.

 

유대광야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먹고 살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물을 마시는 것조차 어려운 땅에서, 그들의 삶은 온전히 하나님께 맡겨질 수 밖에 없었다. 그들이 원치 않아도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 뿐이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시는 만나와 메추라기에 의지했고, 자신들의 걸음조차도 하나님께 맡겼다.
(출애굽기 13:21-22)
21 여호와께서 그들 앞에서 가시며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그들의 길을 인도하시고 밤에는 불 기둥을 그들에게 비추사 낮이나 밤이나 진행하게 하시니
22 낮에는 구름 기둥, 밤에는 불 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
광야에서 예수님께서도 이와 같이 지내셨음을 짐작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금식하시며 철저하고 온전하게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자기를 낮추어 하나님께 전적으로 순종할 준비를 하셨다. 모세 이상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이끌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준비하셨던 것이다.

광야가 바로 이를 위한 장소임을 성경은 또한 분명하게 말씀해 준다.
(신명기 8:2)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 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 알려 하심이라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사탄"에 해당하는 '사타나'는 '적대자'라는 의미이며, 구약성경의 '사탄'을 음역한 말이다. 사단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에서 끊임없이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을 대적하고 참소하는 영적 존재이다.

"시험을 받으시며"에 해당하는 '페이라조메노스'는의 원형인 '페이라조'는 '(실족하게) 시도하다', '증거를 진술하다', '시험하다', '유혹하다'라는 의미이다. 이는 실족하게 만드는 유혹만이 아니라 더욱 성숙하게 만드는 연단의 의미도 지니고 있다. 여기서도 이 시험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메시야로서의 사역을 포기하도록 만드는 사단의 유혹이지만, 또한 하나님의 계획 아래에서 예수님을 연단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마가복음에서는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셨다'라고 간략히 기록했지만,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사단의 시험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사단의 시험은 세상에서 잘 먹고 사는 것, 명예를 얻는 것, 권세를 얻는 것에 대한 유혹을 통한 시험이었다.

예수님께서는 사단의 시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기셨다.

(마태복음 4:3-10)
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6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8 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이 시험을 통해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함을 몸소 보여주시고 가르쳐 주셨다. 이는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만나로 살았음과 같다.  

(신명기 8:3)

3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께서 이 시험들을 겪으시고, 이기심으로써 본을 보여주신 것은 이 시험들이 인간의 주변에 상존하는 유혹들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주변에서 이러한 사례들을 많이 볼 수 있으며, (사례1, 사례2, 사례3 등) 예수님을 따라 말씀에 굳게 서서 이겨야 한다.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40일을 금식하시고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는 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를 드러낸다. 유대 광야에는 표범이나 여우 등의 들짐승의 위협이 존재했다.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마태복음을 참고하면 예수님께서 사단의 시험을 이기시고 사단이 떠난 후 천사들이 와서 예수님을 섬겼다. 

(마태복음 4:11)
11 이에 마귀는 예수를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드니라

사단이 예수님을 시험한 것과 달리 천사들은 예수님을 섬겼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려주며, 또한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지켜주셨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광야생활 가운데에서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키셔서 그들의 의복이 헤어지지 않고 그들의 발이 부르트지 않았음과 같다.

(신명기 8:4)

4 이 사십 년 동안에 네 의복이 해어지지 아니하였고 네 발이 부르트지 아니하였느니라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성령이 임하셨고, 하늘로부터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라는 말씀이 들렸다. 그리고, 광야에서 40일을 보내시며 금식하시고, 사단의 시험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기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로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아들임을 보여주셨다.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에서의 시험을 이기시기까지의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예수님 자신과 같이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아들이 될 수 있는지를 알려준다.

"수종들더라"에 해당하는 '디에코눈'의 원형 '디아코네오'로부터 초대교회에서 교회를 섬겼던 집사를 가리키는 '디아코노스'라는 말이 생겨났다.

 

14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After John was put in prison, Jesus went into Galilee, proclaiming the good news of God.

요한이 잡힌 후

"후"에 해당하는 '메타 데'는 마가가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할 때 자주 사용하는 독특한 표현이다. 이는 '그리고 그 후'라는 의미이다.

"잡힌"에 해당하는 '파라도데나이'의 원형 '파라디도미'는 '넘기다'의 의미이며, 여기서는 수동태로 쓰였으므로 요한이 헤롯 당국에 넘겨졌음을 나타낸다.

요한은 헤롯이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 든 것이 옳지 않다고 지적했다가 잡혀서 옥에 갇혔고, 이로 인해 요한의 사역은 마감되었다.

(마가복음 6:17-28)
17 전에 헤롯이 자기가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에게 장가 든 고로 이 여자를 위하여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잡아 옥에 가두었으니
18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동생의 아내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세례 요한은 예수님의 길을 선포하고 준비시키는 자였으므로 세례 요한의 사명이 마감됨과 더불어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되는 것이다. 이는 예수님의 본격적인 사역이 시작된 때를 나타낸다.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이는 예수님의 본격적인 사역이 시작된 장소를 나타낸다.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금식하시고 시험을 이기신 후에 요한이 잡힌 후에 갈릴리로 오시기까지 어딘가에서 활동하셨다. 이에 관한 것은 요한복음을 통해서 보다 확실히 알 수 있다.

(요한복음 3:24)
24 요한이 아직 옥에 갇히지 아니하였더라
(요한복음 4:3)
3유대를 떠나사 다시 갈릴리로 가실새
(요한복음 4:43)
43이틀이 지나매 예수께서 거기를 떠나 갈릴리로 가시며

이로부터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라는 구절은 요한복음 4:43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요한복음 외의 공관복음서에는 갈릴리로 오시기 전까지의 사역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갈릴리는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였던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었으며, 천대받는 땅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천대받는 땅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삶을 사셨다.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사명을 시작하신다. 이 사명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었으며, 마가복음 1:1에서 밝힌 바대로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다.

(마가복음1:1)
1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시작이라

"하나님의 복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복음', '하나님께서 주신 복음'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하나님에 관한 복음'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만이 가장 정확하게 전할 수 있는 복음이다. 이 복음을 전파하는 일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사역의 본질이었다.


15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The time has come," he said. "The kingdom of God is near. Repent and believe the good news!"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예수님께서 사명을 시작하시면서 가장 먼저 외치신 말씀이며, "하나님의 복음(14절)"이 무엇인지를 알려준다.

"때"에 해당하는 '카이로스'는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 속에 개입하시는 구속사적 시간을 가리킨다. 이는 인간의 역사 속에서 흘러가는 '크로노스'와는 다른 것이다.

"찼고"에 해당하는 '페플레로타이'는 완료 수동태 동사로서 하나님이 예정하신 시간에 이르렀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바울도 하나님이 예정하신 때에 예수님이 오셨음을 말했다.

(갈라디아서 4:4)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이 때는 아담과 하와, 곧 인간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범죄한 때에 하나님께서 아들을 통한 구속의 계획과 함께 정하신 때이다.

"하나님 나라"에 해당하는 '헤 바실레이아 투 데우'는 구약성경 및 유대의 묵시문학과 랍비문학에도 자주 나타나는 표현이다. 이는 하나님의 통치를 강조하는 개념이며, 통치에는 범위와 영역의 개념이 포함되므로 이는 공간적인 의미도 포함하고 있다. 즉 복음의 전파는 복음을 듣는 이들을 변화시키고 이를 통해 그들의 삶의 영역을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영역, 곧 하나님 나라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는 것이다.

"가까왔으니"라는 말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통해 구원의 일이 이제 곧 시작됨을 의미한다.

회개하고

"회개하고"에 해당하는 '메티노에이테'의 원형인 '메타노에오'이고, 여기서 '메타'는 '다르게'라는 의미이고, '노에오'는 '생각하다'라는 의미로서 회개란 본래 '다르게 생각함'이라는 의미이다. 이는 '어떤 일에 대해서 후회하다'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나함'의 동의어이다. 신약성경에서는 이 단어가 단순한 후회가 아니라 사람의 마음을 바꾸어 행위에 변화를 일으킨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이런 의미에서는 '돌이키다'리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슈브'와 의미가 통한다.

이 회개는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에서 마음과 생각을 다르게 바꾸고 이의 결과로서 구체적인 행위의 변화까지 이끌어냄을 의미한다.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히 회개하라에서 그치지 않는다. 죄를 뉘우치고 하나님께 돌아오는 회개에 이어서 복음을 믿으라는 말씀으로 이어진다. "복음"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때가 차서 선포되는 구속의 길인 것이다. 

"믿으라"에 해당하는 '피스류에테'의 원형 '피스튜오'는 어떤 사실에 대해 단순하게 받아들이거나 인정한다는 의미에 그치지 않고 인격적으로 완전하게 신뢰하고 자신을 전적으로 의탁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이 진정한 회개이다.

여기서 "회개하고"와 "믿으라"는 모두 명령형 현재 시제이다. 헬라어에서 현재 시제는 단회성이 아닌 계속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회개와 믿음은 삶의 한 시점에만 일어나는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명령이다.


16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As Jesus walked beside the Sea of Galilee, he saw Simon and his brother Andrew casting a net into the lake, for they were fishermen.

16절부터 20절까지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사역을 위해 최초로 네 명의 제자를 부르시는 사건을 언급하고 있다. 이 사건은 공관복음서에 모두 언급되며 (마태복음 4:18-22, 마가복음 1:16-20, 누가복음 5:1-11), 그 중 누가복음에 가장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를 직역하면 '그리고 그가 그 갈릴리 바다를 따라 거닐고 계실 때’이다. 이 구절의 원문은 '그리고'에 해당하는 '카이'로 시작되며, 이 구절의 사건이 앞의 구절과 연결되는 것임을 보여 준다.

"갈릴리 해변"이 위치하고 있던 갈릴리 호수는 갈릴리 호수는 남북으로 21km, 동서로 12km, 둘레가 53km, 수심이 50m에 달하는 큰 호수이다. 바다로 불리기도 할 정도의 크기이며, 일반 해수면보다 240m나 낮은 내륙 호수로서 어족 자원도 약 200여 종으로 풍부하여 고기잡이가 성행했다. 예수님의 첫번째 네 명의 제자도 이곳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였다.

가장 먼저 제자로 부르심을 받은 시몬, 곧 베드로는 그 형제 안드레와 함께 이 곳 갈릴리 해변에서 예수님을 처음 만났다.

마가복음의 내용은 베드로가 설교했을 것으로 짐작되며, 마가복음은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난 때부터 시작된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베드로는 이 때부터의 예수님만 알고 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 때부터의 예수님께만 관심이 있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가능성은 더 낮다.) 마가복음에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것도 베드로가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모르기 때문일 것으로 생각된다. 사도행전에 기록되어 있는 베드로의 설교나 베드로의 서신에서도 예수님의 탄생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시몬과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시몬"은 히브리식 이름으로 '들음'이라는 의미이다. 시므온과 같은 이름이다.

(창세기 29:33)

33 그가 다시 임신하여 아들을 낳고 이르되 여호와께서 내가 사랑 받지 못함을 들으셨으므로 내게 이 아들도 주셨도다 하고 그의 이름을 시므온이라 하였으며

나중에 시몬은 아람어로는 '게바', 헬라어로는 '베드로', 즉 '반석'이라는 뜻의 이름을 받았다.

"안드레"는 헬라식 이름으로 '남자'라는 의미이다. 요한복음의 기록을 보면 그는 세례 요한의 제자였으며, 예수님께서 갈릴리로 오시기 전, 초기에 유대에서 사역하시던 예수님을 먼저 만난 후에 그의 형인 시몬을 예수님께 인도했다.

"어부"는 '물고기를 낚는 일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이다. 물고기를 낚아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시몬과 안드레의 일이었다.

바다로 불릴 정도의 크기를 가진 갈릴리 호수의 주변에는 많은 어부들이 있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수많은 어부들 중에 바다에 그물 던지고 있던 시몬과 안드레를 보셨다.

※ 마가복음에는 '곧' 외에 '그리고'라는 단어가 매우 빈번하게 사용되어 있는데, 예를 들어 16-20절의 경우 다음과 같이 10회 사용되어 있다.

(마가복음 1:16-20)
16
(그리고) 갈릴리 해변으로 지나가시다가 시몬과 (그리고) 그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17
(그리고)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그리고)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18
(그리고) 곧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19
(그리고)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리고)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리고)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20
(그리고) 곧 부르시니 (그리고)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Come, follow me," Jesus said, "and I will make you fishers of men."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따라오라

이 구절만을 보면 예수님께서 어느날 갈릴리 해변을 산책하시다가 수많은 어부들 중에서 우연히 시몬과 안드레를 보시고, 갑자기 그들에게 "나를 따라오너라"라고 말씀하시며 제자로 부르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요한복음의 기록을 보면 시몬과 안드레는 이미 유대 지역에서 예수님을 만나 대화를 나눈 적이 있었다.

(요한복음 1:35, 40-42)

35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따르는 두 사람 중의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라
41 그가 먼저 자기의 형제 시몬을 찾아 말하되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 하고 (메시야는 번역하면 그리스도라)
42 데리고 예수께로 오니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 (게바는 번역하면 베드로라)

뿐만 아니라 누가복음의 기록을 보면 갈릴리 해변에서도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시몬의 배에서 전하셨고, 이어 시몬으로 하여금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많은 고기를 잡게 하신 후에 이들을 부르셨다고 기록되어 있다.

(누가복음 5:3-8)
3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4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이르시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
5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6 그렇게 하니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아 그물이 찢어지는지라
7 이에 다른 배에 있는 동무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도와 달라 하니 그들이 와서 두 배에 채우매 잠기게 되었더라
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따라서 예수님의 부르심은 어느날, 우연히, 갑자기 이루어진 일이 아니고, 이미 그들을 만나셨고, 그들을 파악하셨고, 제자로 부르신 것이다. 즉 절대적이고 주권적인 선택이며, 예정된 선택대로 부르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기간 동안 허투루 시간을 보내지 않으셨다.

마가는 여기서도 상세한 정황을 생략한 채로 '예수님께서 그들을 제자로 부르셨고 그들이 순종했다'는 사실만을 간략하게 기술하고 있다.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시몬과 안드레를 제자로 부르신 이유이다.

여기서 "사람을"에 해당하는 '안드로폰'은 남성 복수형 명사로서 '사람들을'이다. "낚는 어부가"에 해당하는 '할리에이스'에는 '낚는'이라는 단어가 없다. 따라서 "사람을 낚는 어부"는 본래 '사람들의 어부들'이라는 의미이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시몬과 안드레를 부르신 이유는 본래 '사람의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것이었다.

어부는 본래 생계 유지, 곧 자신의 유익을 위해 물고기를 낚지만, "사람을 낚는 어부"는 사람을 건져내어 살리는 어부이다.

이 말씀은 '너희들을 전도자가 되게 해서 사람들을 살리게 하겠다', '내 제자가 되게 해서 사람들을 살리는 복음을 배우게 하겠다', '사도의 삶을 살게 해서 사람들을 살리는 복음을 전하게 하겠다'는 의미이다. 예수님께서 이 크고 놀라운 사명을 위해 바다에 그물을 던지던 어부를 부르신 것은 하나님이신 예수님의 절대적이고 주권적인 선택이었다.

"사람을 낚는 어부"라는 표현은 어부였던 시몬과 안드레가 이해하기 쉬운 개념이었다. 또한 이는 유대인에게 이해하기 쉬운 개념이기도 했다. 이는 에스겔 47장에 기록된 말씀, 곧 성전으로부터 흘러 나온 물이 아라바 바다에 이르고 이 물로 바다가 되살아나 고기가 심히 많아지며 강 가에 어부가 서서 그물을 치게 될 것이라는 말씀으로부터 이해할 수 있다.

(에스겔 47:8-10)
8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이 물이 동쪽으로 향하여 흘러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에 이르리니 이 흘러 내리는 물로 그 바다의 물이 되살아나리라
9 이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번성하는 모든 생물이 살고 또 고기가 심히 많으리니 이 물이 흘러 들어가므로 바닷물이 되살아나겠고 이 강이 이르는 각처에 모든 것이 살 것이며
10 또 이 강 가에 어부가 설 것이니 엔게디에서부터 에네글라임까지 그물 치는 곳이 될 것이라 그 고기가 각기 종류를 따라 큰 바다의 고기 같이 심히 많으려니와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회복을 가리키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다.

고기가 심히 많아지는 때, 그래서 강 가에 어부들이 서서 물고기를 낚는 때는 이스라엘의 회복의 때이며 하나님 나라의 때, 그리스도의 때인 것이다.


18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At once they left their nets and followed him.

이유나 배경에 대한 설명없이 다짜고짜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고민없이 즉각적으로 순종한 시몬과 안드레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달하는 힘이 있는 말이다.

시몬과 안드레는 즉각적인 순종을 통해서 예수님의 제자됨의 태도와 의미가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누가복음 9장에도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부르신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나, 그들은 베드로와 안드레와는 달리 즉각적으로 순종하지 않을 뿐더러 세상일을 핑계삼아 순종을 미룬다.
(누가복음 9:59-62)
59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60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61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그물을 버려 두고 따르니라

누가 누구를 좇았는지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쉽게 파악할 수 있다. "좇으니라"에 해당하는 '에콜루데산 아우토'에서 '아우토'가 '그를'이라는 의미이며, '에콜루데산'이 3인칭 복수 동사이므로 '저희가 그를 좇으니라'는 의미가 된다. 

시몬과 안드레는 예수님을 따르는 일에 있어서 "곧" 자신의 생계수단인 그물을 버려두고, 즉 생계를 버려두고 따를 만큼 절대적인 가치를 두었다.

시몬과 안드레는 예수님의 말씀에, 즉 예수님께 절대 가치를 두는 순종을 통해서 예수님의 제자됨의 태도와 의미가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19 조금 더 가시다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When he had gone a little farther, he saw James son of Zebedee and his brother John in a boat, preparing their nets.

조금 더 가시다가

예수님께서는 그물을 버려두고 따르는 시몬과 안드레와 함께 갈릴리 해변을 조금 더 걸으셨다.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보시니

예수님께서는 그 수많은 어부들 중에 배에서 그물을 깁고 있던 야고보과 요한을 보셨다.

"야고보"는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야곱'의 헬라식 이름으로 '발꿈치를 잡은 자'라는 의미이다.

(창세기 25:26)
26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하였으며 리브가가 그들을 낳을 때에 이삭이 육십 세였더라

"요한"은 '여호와의 은혜'라는 의미이다.

이들은 세베대와 살로메 사이에서 태어난 형제로서 이들 중에 야고보가 항상 먼저 언급되는 것으로 보아 형으로 보인다.

이 두 형제를 제자로 삼으실 때 예수님께서는 이 둘에게 '보아너게', 즉 '우뢰의 아들'이라는 별명을 주셨다.

(마가복음 3:17)
17 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이니 이 둘에게는 보아너게 곧 우뢰의 아들이란 이름을 더하셨으며

목소리가 컸거나 말이 많았다고 짐작할 수 있으며, 또한 이들은 성격이 급하고 과격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마리아 지방 사람들이 복음 전도를 받아들이지 않자 예수께 불을 내려 멸하시도록 간구할 정도로 (누가복음 9:54) 복음 전도에 임하는 자세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 대한 태도에 있어서 열정적이고 과격했다.

이들 중 야고보는 예수님의 12제자들 가운데 가장 먼저 죽임을 당했다.

(사도행전 12:1-2)
1 그 때에 헤롯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하여
2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요한은 12제자들 중에서 가장 늦게까지 살았으며, 요한복음과 서신서, 계시록을 저술하는 등 많은 일들을 하다가 죽었다.

그들도 배에 있어 그물을 깁는데

"깁는데"에 해당하는 '카타르티존타스'의 원형인 '카타르티조'는 '수리하다', '완성하다', '준비하다'라는 의미가 있다. 야고보와 요한은 다음 출어를 위해서 고기잡이 도구인 그물을 점검하고 있었다.


20 부르시니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Without delay he called them, and they left their father Zebedee in the boat with the hired men and followed him.

곧 부르시니

'곧'이라는 표현이 예수님께서 야고보와 요한을 보시고 부르시는 데에 대해 사용되었다. 배에서 그물 깁던 그들을 보시자마자 부르신 것이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수제자라고 할 수 있는 베드로와 함께 예수님과 가장 가깝게 접촉한 세 명의 제자그룹을 형성했으며, 특별히 요한은 자신을 가리켜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표현했으며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할 정도로 예수님과 가까운 제자가 된다.

(요한복음 19:26)
26 예수께서 자기의 어머니와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이렇게 소중한 제자가 될 야고보와 요한 형제를 보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자마자 "곧" 부르신 것이다.

그 아버지 세베대를 품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 두고 예수를 따라가니라

"그 아비 세베대를"이라는 구절은 야고보와 요한이 철저하게 예수님을 따라나섰다는 사실을 더욱 생동감있게 만들어준다.

"버려두고"에 해당하는 '아펜테스'의 원형 '아피에미'는 '보내다', '이혼하다', '(의무나 책임을) 거절하다'라는 의미이다. 야고보와 요한이 철저하게 예수님을 따라나섰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야고보와 요한은 자기들의 생계수단이었던 배를 버렸고, 당연히 깁고 있던 그물도 버렸을 것이며, 함께 일하던 삯꾼들도 버렸고, 아버지인 세베대 또한 남겨 두고 예수님을 따랐다.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들을 철저히 포기하고 버린 것이다. 이전까지 그들의 마음은 이런 것들에게 있었겠지만, 이제 그들은 마음은 오직 예수님께로 향한다.

(누가복음 12:34)
34 너희 보물 있는 곳에는 너희 마음도 있으리라

이는 누가복음에 나타난 어떤 사람들의 모습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며, 시몬과 안드레에 이어 다시 한번 제자됨의 의미와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누가복음 9:59-62)

59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좇으라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나로 먼저 가서 내 부친을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60 가라사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61 또 다른 사람이 가로되 주여 내가 주를 좇겠나이다 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케 허락하소서
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또한, 이 장면은 아브라함이 부름을 받던 순간과 매우 흡사하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하여 자신의 삶의 울타리였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났다.

(창세기 12:1, 4)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한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으며, 예수님의 부름에 순종한 시몬과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은 복음의 사도가 되었다.

 

21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They went to Capernaum, and when the Sabbath came, Jesus went into the synagogue and began to teach.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본 절은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의 해변에서 제자들을 부르신 일과 가버나움에 들어가신 후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신 일을 연결해 준다. 아마도 두 사건 사이에는 시간적 간격이 존재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 그들은 일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 날은 안식일이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저희가"에 해당하는 말은 원문에는 없지만, "들어가니라"에 해당하는 '에이스포류오마이'로부터 번역할 수 있다.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는 단순히 이동 과정에서의 행선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생활하심을 의미한다.

"가버나움"은 '나훔의 동네'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갈릴리 호수에서 가까운 도시 중의 하나로서 스불론 지파와 납달리 지파의 땅에 위치하고 있었다.

(마태복음 4:13)
13 나사렛을 떠나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해변에 있는 가버나움에 가서 사시니

다메섹과도 연결되는 동서 교통의 요충지였고, 어업이 발달했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 비해서 인구밀도가 아주 높았다. 그래서 세관 등의 관공서와 군인들이 주둔하는 부대도 위치하고 있었다. 즉, 교통, 경제, 행정, 군사적인 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도시였다. 또한 문화아 정치적인 면에서는 로마를 상징하는 도시였던 '디베랴'에 견줄 만한 도시였다. 마태의 고향이자 베드로의 집 또는 처가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 이 땅은 어둠의 땅으로 인식된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에서 사셨음은 어둠의 땅에 빛이 비침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마태복음 4:14-16)
14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15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16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 하였느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예수께서"에 해당하는 말은 원문에는 없지만, "가르치시매"에 해당하는 '에디다스켄'으로부터 번역할 수 있다.

"안식일"는 이후에 진행되는 일들의 배경이 되는 날이다. 안식일에 예수님께서는 회당에 들어가서 하나님 나라의 말씀을 가르치셨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① 이 날이 안식일이라는 점, ② 이 날에 무엇을 가르치셨는가라는 점이다.

먼저, 이 날에 무엇을 가르치셨는가와 관해서는 15절에 나타난 바와 같이 예수님께서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복음을 전하셨으니 이를 가르치셨을 것으로 짐작 할 수 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께서 이 무렵에 전하신 말씀을 보다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누가복음 4:16-19)
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17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된 데를 찾으시니 곧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때가 찼고'라는 말씀은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예수님께서 그리스도로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구원의 사역을 시작하시는 때가 된 것이다. 그리고 이 때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충만하셔서 사역을 시작하셨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라는 말씀은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라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 나라는 포로되고 눌린 삶을 벗어나 자유함을 누리는 나라이며, 눈 먼 삶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보고 사는 나라이다. 이 하나님 나라는 요한이 보고 기록했다.

(요한계시록 22:3-5)
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4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는 말씀은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말씀으로부터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의 때가 전파되었으니 이 은혜를 이루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복음인 것이다.

또한, 이 가르침을 안식일에 가르치셨음을 주목해야 한다. 이는 '때가 차서 가까이 온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곧 '안식'임을 가리키는 것이다. 하나님과 예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후 사단은 하나님의 안식을 깨뜨렸다. 하나님의 안식은 반드시 회복되어야 하며,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이를 회복시키실 것이다. (참고)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이루기 위해 이 땅에 오셨다.

"회당"에 해당하는 '쉬나고게'는 예배를 드리기 위한 유대인들의 공식적 모임을 가리키거나 유대인들이 자녀를 교육하거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이던 건물을 가리킨다. 이는 바벨론 포로 당시 성전을 상실한 유대인들이 함께 모여 기도하고 토라를 연구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렇게 시작된 회당은 예수님 당시와 초대교회 당시에도 유대인들이 사는 곳이면 거의 모든 곳에 세워져 있었기 때문에 사도들과 바울이 복음을 증거하는 중심지로 삼기도 했다. 회당에서는 평일에는 율법에 대한 교육이 이루어졌고, 안식일에는 기도, 찬양, 성경 봉독 및 랍비의 강해와 설교를 통해 예배를 드렸다.
"들어가"라는 표현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와 '(회당에) 들어가'에서 사용되고 있는데, 원어로 보면 차이가 있다.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에 해당하는 '에이스포류온타이'의 원형인 '에이스포류오마이'는 지역에서 지역 간의 이동을 나타내고, '(회당에) 들어가'에 해당하는 '에이셀돈'의 원형인 '에이세르코마이'는 넓은 장소에서 구체적인 장소로의 이동을 나타낸다.

"가르치시매"에 해당하는 '에디다스켄'은 3인칭 단수 미완료 과거 동사이므로 직역하면 '그가 가르치고 계셨다'라는 의미가 된다. 이는 예수님이 회당에서 가르치시는 일은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계속되었던 일임을 나타낸다. 가르치시는 사역이야말로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에서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에디다스켄'의 원형 '디다스코'의 명사형인 '디다스칼로스’, 즉 ‘선생’이란 단어가 예수님에 대하여 11회나 사용되었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22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The people were amazed at his teaching, because he taught them as one who had authority, not as the teachers of the law.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뭇 사람"에 해당하는 말은 원문에는 없지만, "놀라니"에 해당하는 '엑세플렛손토'로부터 번역할 수 있다. 또한 반대로 원문에 있는 '~위에' 또는 '~에 대하여'라는 뜻의 전치사 ‘에피’는 번역되지 않았다.
이 구절을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하면 '그리고 그들이 그의 교훈에 대하여 놀라고 있었다'가 된다.
"교훈"에 해당하는 '디다케'는 바로 뒤에 나오는 "그 가르치시는 것"에 해당하는 '디다스콘'과 동일한 어근에서 파생된 단어이다. 이 단어들이 가리키는 것, 이 단어들을 사용한 이유는 다음의 본문인 "놀라니"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놀라니"에 해당하는 '엑세플렛손토'의 원형 '에크플렛소'는 예수님의 교훈에 놀라는 청중들의 반응을 묘사하는 표현인데 마가복음에서 다섯 번이나 사용되었다.

(마가복음 1:22)

22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마가복음 6:2)
2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서 가르치시니 많은 사람이 듣고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냐 이 사람이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냐
(마가복음 7:37)
37 사람들이 심히 놀라 이르되 그가 모든 것을 잘하였도다 못 듣는 사람도 듣게 하고 말 못하는 사람도 말하게 한다 하니라
(마가복음 10:26)
26 제자들이 매우 놀라 서로 말하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 하니
(마가복음 11:18)
18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이 단어는 '밖으로'라는 뜻의 '에크'와 '치다'라는 뜻의 '플렛소'가 결합된 동사로서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인해 크게 놀라다' 또는 '정신이 멍하다', '‘넋을 잃고 있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정작 예수님께서 당시 회당 안에서 가르치신 내용이 정확히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공관복음서의 어디에도 언급이 없다. 이러한 사실은 마가를 비롯한 공관복음서의 기자들이 예수님의 교훈과 가르침의 내용보다는 그 분의 가르침의 행위와 능력에 대해 관심을 기울였음을 반영하는 것이며, 또한 독자들도 이에 집중하기를 원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비판적으로 보자면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무지함을 드러낸다고 이해할 수도 있다.

예수님의 교훈을 들은 뭇 사람의 놀란 반응은 누가복음에 보다 상세히 나타나 있다.

(누가복음 4:20-22)

20 책을 덮어 그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앉으시니 회당에 있는 자들이 다 주목하여 보더라
21 이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22 그들이 다 그를 증언하고 그 입으로 나오는 바 은혜로운 말을 놀랍게 여겨 이르되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이는 그가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권세 있는 자"에 해당하는 '엑수시안 에콘'은 예수님의 가르침의 능력을 강조하기 위해서 사용된 용어이다. 뭇 사람들이 듣기에 예수님의 말씀은 권세있는 자의 가르침과 같이 권위가 있었다. 권위는 다른 사람을 이끄는 힘, 복종시키는 힘을 의미하며, 이는 예수님의 말씀에 공감하고 감동받았음을 가리킨다.
"서기관들"에 해당하는 '호이 그람마테이스'는 예수님의 가르침의 능력과 대조하기 위해 사용된 용어이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서기관들의 가르침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①예수님은 진리만을 말씀하셨지만, 서기관들은 율법 및 사람의 유전에 따른 잘못되거나 왜곡된 내용들을 말했다.
②예수님은 생활 주변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친근한 소재들을 통해 쉽게 가르치셨지만, 서기관들은 일반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형이상학적 내용이나 사람들의 삶을 규제하고 억압하는 내용들을 말했다.
③예수님은 생명과 구원을 위해 가장 중요한 복음을 선포하셨지만, 서기관들은 자신들의 교리를 옹호하기 위한 하찮은 것들을 주장했다.
④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세로 말씀을 전하셨지만, 서기관들은 자신이 속한 무리의 선배들로부터 배운 인간의 권위에 의존한 내용들이었다.
가버나움에 거하는 사람들은 이제까지 서기관들이 전하는 질책을 통해 사람을 옭아매는 율법적인 이야기, 화려한 언변과 지식을 내세운 외식적인 이야기만을 듣다가 그와는 전혀 다른 예수님의 능력있는 말씀을 듣고 놀란 것이다.


23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Just then a man in their synagogue who was possessed by an evil spirit cried out,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마가복음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기적은 귀신들린 사람으로부터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다.

"마침"은 기적이 일어난 때로서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신 안식일을 가리킨다.

"저희 회당에"는 기적이 일어난 장소로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회당을 가리킨다.

"더러운"에 해당하는 '아카다르토'는 먼저 우상 숭배와 같은 죄를 지음으로 말미맘아 의식적으로 부정하게 되어 하나님이 받으실 수 없는 상태를 가리키고, 도덕적으로는 추잡하고 불결한 상태에 있는 경우를 가리킨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특히 영적인 면에서는 악령으로 인하여 부정하게 된 상태를 가리킨다. 이는 다음 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는 예수님을 가리키는 명칭과 대조를 이룬다. 이를 통해서도 본문에 나오는 '더러운'이란 표현이 위생적이거나 도덕적인 면에서의 불결함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악한 영에게 사로 잡혀 하나님을 떠나 반역하는 악한 인격의 불완전한 상태를 묘사하는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귀신"에 해당하는 '프뉴마티'의 원형 '프뉴마'의 일차적 의미는 '영'이다. 현대의 정신의학이나 심리학에서는 귀신의 존재를 부인하고 귀신들림의 현상을 하나의 정신병이나 인격 장애의 일종으로 간주하는 경향이 있지만, 성경의 증거를 통해 볼 때 귀신은 존재하며 귀신들리는 현상이 있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들린"에 해당하는 '엔'은 전치사로 '~안에'라는 뜻이다.

그 때 그 곳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있었다. 원문의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을 직역하면 '부정한 영 안에 있는 사람'이 된다.

예수님께 치유함을 받은 병자들이나 귀신들린 사람들은 대부분 구체적인 인적사항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 이유는 몇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① 너무 많아서 일일이 기록하기 어려웠다.

② 예수님의 관심사는 그들을 치유하고 그들의 죄를 사해주는 것 뿐이었기 때문에 상세히 언급할 필요가 없었다.

③ 그들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오늘날 성경을 읽는 사람 자신이 곧 그들인 것이다.

"소리질러 가로되"는 귀신들린 사람의 행동의 하나이다. 이것은 소리지른 사람의 속에 있는 귀신이 소리지른 것이다. 귀신은 예수님에 관해 이미 알고 있었다.


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What do you want with us, Jesus of Nazareth? Have you come to destroy us? I know who you are--the Holy one of God!"

나사렛 예수여

한글성경은 이 구절을 더러운 귀신 들린 자가 예수님을 향해 처음 한 말로 번역하였지만, 본래 '나사렛 예수여'라는 호칭은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라는 문장 뒤에 위치한다.
"나사렛"은 예수님의 출생지는 아니었지만 유년 시절을 보내신 곳으로서 예수님과 깊이 관련된 동네이다. 
귀신은 예수님께서 어디서 자라셨는지, 혹은 예수님에 관한 구약의 예언을 알고 있다.

(마태복음 2:22-23)
22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의 아버지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23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그러나 나사렛은 유대인들에 의해 경멸받던 지명이었으며, 어둠의 땅으로 인식되는 곳이었다.
(요한복음 1:46)
46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귀신이 예수님이 나사렛 출신이라고 소리 지른 것은 예수님의 권위를 떨어뜨리려는 의도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갈릴리를 대표하는 큰 도시였던 가버나움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호칭이었다.
마가복음에는 '나사렛 예수'라는 명칭이 모두 네 번 등장한다.
(마가복음 1:24)
24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마가복음 10:47)
47 나사렛 예수시란 말을 듣고 소리 질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마가복음 14:67)
67 베드로가 불 쬐고 있는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마가복음 16:6)
6 청년이 이르되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그러나 '나사렛 예수'라는 명칭은 나중에 사도행전에서 성령이 임하신 후에 베드로가 설교할 때, 그리고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을 일으킬 때 베드로가 하는 말 등에서 예수님을 가리키는 고유한 명칭으로서 사용되며, 나사렛은 존귀한 지명이 된다. 
(사도행전 2:22)
22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언하셨느니라
(사도행전 3:6)
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으라 하고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본래는 더러운 귀신 들린 자가 가장 먼저 한 말이 이 구절이며, 직역하면 '우리가 당신에게 무엇입니까'이다. 영어로 번역된 번역본 중에는 '당신은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십니까'라고 번역된 경우도 있고, ‘우리들을 홀로 두소서'라는 내용을 추가한 경우도 있다. 
"우리"라는 표현에 대해서는 귀신이 귀신들린 자와 자신을 복수 인격으로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고, 악한 영에 들린 자의 입을 빌어 말하는 귀신이 하나가 아닌 여럿이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는 예수님과 더러운 귀신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므로 괴롭히지 말아달라는 의미이다. 귀신들은  예수님을 두려워하고 있으며, 이는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귀신들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중요한 목적 중의 하나를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사단의 권세를 멸하여 죄와 사망의 권세 아래에서 고통 당하는 당신의 백성들을 구원하러 오신 것이다.
(요한일서 3:8)
8 죄를 짓는 자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 하심이라

이것이 귀신들이  예수님을 두려워한 이유이다. 귀신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어떤 권세를 갖고 계신지도 알고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이 임한다.
(마가복음 16:17)
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에는 메시야가 도래하면 모든 악한 영들을 멸망시킬 것이라는 사상이 이미 널리 퍼져 있었다.
(스가랴 13:2)
2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그 날에 내가 우상의 이름을 이 땅에서 끊어서 기억도 되지 못하게 할 것이며 거짓 선지자와 더러운 귀신을 이 땅에서 떠나게 할 것이라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라는 구절로부터 귀신들은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명확하게 알고 있음이 나타난다.

"하나님의 거룩한 자"는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23절)"과 대조되는 개념이며 예수님의 신성과 거룩하심을 명확하게 드러내는 표현이다.

귀신도 예수님을 '알고 있었다'는 사실로부터 믿음이란 단순한 지식이 아니고 체험하고 의지하며 경외하고 사랑하는 행위임을 깨달을 수 있다.


25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Be quiet!" said Jesus sternly. "Come out of him!"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꾸짖어"에 해당하는 '에페티메센'의 원형인 '에피티마오'는 '엄하게 경고하다', '책망하다'라는 의미이다. 
예수님 당시에 마술사들은 귀신 들린 자에게서 귀신을 쫓아낼 경우에 독특한 도구를 사용하여 주술적 행위를 함으로써 축귀를 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직 자신의 말씀의 권위만을 사용하셔서 꾸짖으심으로써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행하셨다. 
말씀으로 꾸짖으심으로써 귀신을 쫓아내셨다.
(마가복음 9:25)
25 예수께서 무리가 달려와 모이는 것을 보시고 그 더러운 귀신을 꾸짖어 이르시되 말 못하고 못 듣는 귀신아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 아이에게서 나오고 다시 들어가지 말라 하시매
말씀으로 꾸짖으심으로써 바람을 잠잠하게 하는 등의 자연현상을 주관하셨다.
(마가복음 4:39) 
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말씀으로 꾸짖으심으로써 질병으로부터 회복시키셨다.
(누가복음 4:39)
39 예수께서 가까이 서서 열병을 꾸짖으신대 병이 떠나고 여자가 곧 일어나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이와 같은 예수님의 말씀의 권위는 귀신이 예수님을 두려워한 이유가 무엇인지, 어떤 권세를 갖고 계신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를 직접적으로 명확하게 보여준다.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예수님께서 귀신을 꾸짖으시면서 명령하신 말씀은 "잠잠하라"와 "나오라"이다.
"잠잠하라"에 해당하는 '피모데티'의 원형 '피모오'는 '입에 재갈을 물리다'라는 의미가 있다. 이는 더러운 귀신이 사람을 통해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24절)"라고 소리 지른 내용을 말하지 말라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즉 예수님의 정체에 대한 발설을 엄히 금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정체는 곧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이므로 더러운 귀신들의 입을 통해 발설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며, 반드시 '신앙고백'을 통해서만 말해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 고백이 교회의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단순히 '말'로서만 발설된다면 하나님의 계획과는 달리 정치적 그리스도 혹은 단순한 유명인으로 변질되어 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정체를 알고 있는 귀신들이 이를 발설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엄히 금하셨다.

(마가복음 1:34)

34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나오라"는 두 번째 명령은 직접적인 '치유 행위'이다. 예수님은 귀신을 잠잠케 하시는데 그치지 않으시고, 귀신에 들려 고생하는 사람으로부터 귀신을 내어 쫓으신 것이다. 여기서 "나오라"에 해당하는 '엑셀데'의 원형은 '엑세르코마이'이며, 이는 21절에 기록된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에 사용된 "들어가"에 해당하는 '에이셀돈'의 원형인 '에이세르코마이'와 접두어만 다를 뿐 동일한 동사이다. 즉 '에르코마이'라는 동사가 앞에 붙은 접두어에 따라 '나가다'와 '들어가다'라는 서로 반대의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또한 '안으로'라는 뜻의 전치사 '에이스'와 결합된 '에이세르코마이'는 회당으로 들어오신 예수님에 대해서 사용되었고, '밖으로'라는 뜻의 전치사 '에크'와 결합된 '엑세르코마이'는 회당에 있던 귀신 들린 사람 속에 있는 귀신에 대해서 사용되었다. 여기서 예수님의 '들어오심'은 귀신의 '나감'과 대조된다. 대조되는 두 사건 사이에는 예수님의 권위 있는 말씀의 선포가 있었다. 이러한 본문의 구성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써 사단의 세력이 멸망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26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The evil spirit shook the man violently and came out of him with a shriek.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로서 말씀에 권위가 있었다. 따라서 귀신은 예수님의 말씀에 따를 수밖에 없었다.
"경련을 일으키고"에 해당하는 '스파락산'은 '발작하며 몸부림치게 하다'라는 의미로서 당시의 상황에 대한 시각적 표현이다.
"큰 소리를 지르며"에 해당하는 "포네산 포네 메갈레"는 '(큰 충격에 의한) 강한 비명을 지르다'라는 의미로서 당시의 상황에 대한 청각적 표현이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에 저항하지 못하고 귀신이 귀신 들린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장면을 공감각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어떤 말씀을 가르치셨는지를 말하고 있지 않지만, 회당에 있던 귀신들린 사람의 언행은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교훈과 가르침의 내용보다는 그 분의 행위와 능력에 관심이 많았으며, 특별히 그에게는 이 일이 무척 인상깊게 느껴졌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기록 덕분에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올 때의 현상을 알 수 있다.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올 때는 사람으로 격렬하게 경련을 일으키게 하고 비명같은 큰 소리를 지른다.

이 모습은 아담의 범죄 이후 계속적으로 인간을 지배해 왔던 악한 영으로부터 승리하시는 예수님의 권세를 효과적으로 나타낸다. 특히 귀신이 큰 소리를 지르는 모습은 마가만의 독특한 표현으로서 악한 영의 세력의 완전한 패배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는 누가복음에는 기록되지 않은 묘사이다. 
(누가복음 4:35)
35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중에 넘어뜨리고 나오되 그 사람은 상하지 아니한지라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실 때의 사건을 통해 '안식'이 무엇인지를 가르쳐주셨다. 또한 귀신 들린 사람으로부터 귀신을 쫓아내심으로써 포로되고 눌린 삶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를 가르쳐주셨다. 죄의 포로로서 살아가는 삶, 죄악에 눌린 채 살아가는 삶은 사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사단은 하나님의 안식을 깨뜨린 원수이다. 예수님께서는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심으로써 '안식'의 회복을 보여주신 동시에 앞으로 어떤 일을 행하실지, 사단이 어찌될 것인지를 가르쳐주셨다.

"나오는지라"에 해당하는 '엑셀덴'의 원형은 '엑세르코마이'이며,동사는 반복적으로 나타나면서 일종의 언어유희처럼 작용하고 있다.


27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The people were all so amazed that they asked each other, "What is this? A new teaching--and with authority! He even gives orders to evil spirits and they obey him."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두 번째로 놀라고 있다. 첫 번째는 권위 있는 자와 같은 예수님의 교훈에 놀랐고(22절), 두 번째는 더러운 귀신들도 순종하는 예수님의 권세에 놀랐다. 22절의 첫 번째 놀람과 여기서의 두 번째 놀람을 비교하면 점층법이 사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① 22절에서는 '뭇사람'이 놀랐지만, 여기서는 '다' 놀라고 있다. 22절에는 주어가 없지만, 여기서는 "다" 또는 '모든'에 해당하는 '하판테스'가 나타나 있다.
② 22절에서는 '그의 교훈'에 놀랐지만, 여기서는 '새 교훈'에 놀라고 있다. "새"에 해당하는 '카이네'의 원형인 '카이노스'는 '지금까지 경험해 보지 못한 완전히 낯선'이라는 의미를 강조하는 단어이다.
③ 22절에는 놀랐다는 기록이 전부이지만, 여기서는 모든 사람들의 말을 직접 기록하여 훨씬 더 생생한 의미를 전달한다.
④ 22절에는 놀랐다는 기록에 '에크플렛소'라는 단어가 사용되었고 개인적 차원의 놀람이 나타나 있지만, 여기서는 '담베오'라는 단어가 사용되었고 사람들이 서로 물어보고 공유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큰 놀람이 나타나 있다. 22절에 사용된 '에크플렛소'는 주로 예수님의 가르침에 대한 청중들의 반응을 묘사하는 경우에 사용되었지만, 여기서 사용된 '담베오'는 전혀 뜻하지 않은 상식 밖의 사건에 의해 크게 놀라는 것을 의미한다. 즉 회당에 모인 사람들은 전혀 생각하지 못했고 경험하지 못했던 낯선 일, 즉 귀신이 쫓겨 나가는 일을 직접 목도함으로써 크게 놀랐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귀신이 쫓겨나는 것을 보고 놀랐다. 그러나 그들은 더러운 귀신들도 순종하는 예수님의 말씀을 단지 '권세 있는 새 교훈'으로만 생각했고, 귀신이 쫓겨나는 기적 자체에만 관심을 가졌을 뿐이었으며, 예수님을 '권위 있는 자'로만 이해했다. 귀신이 순종하는 대상으로서 '하나님의 거룩한 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했다.


28 예수의 소문이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News about him spread quickly over the whole region of Galilee.

예수의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소문"은 회당에서의 기적을 직접 본 사람들에 의해 이내 퍼져나갔다. 소문의 내용은 사람들이 놀란 일, 즉 예수님의 교훈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22절), 그분의 말씀에 더러운 귀신들도 순종한다(27절)는 것이었을 것이다.

"곧"에 해당하는 ‘유뒤스’는 마가가 즐겨 사용하는 단어로서 신속성과 긴박감을 고조시키는 역할을 한다. 특히 28절에서는 예수에 대한 소문이 급속히 확산되는 상황에 대해서, 29절에서는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시몬과 안드레의 집으로 향하는 상황에 대해서, 30절에서는 시몬의 장모에 대해 사람들이 예수님께 묻는 상황에 대해서 연속적으로 세 번이나 사용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복음의 급진성과 예수님의 사역의 긴박함 및 기적에 대한 관심을 드러낸다.
"갈릴리"는 유대인들에 의해 경멸받던 지명이었으며, 어둠의 땅으로 인식되는 곳이었다. 이 땅에 예수님의 소문이 퍼졌다는 것은 어둠의 땅에 빛이 비침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사방"에 해당하는 '페리코론'은 '지역', '구역'을 뜻하는 '코로스'와 '~의 둘레에', '~의 주변에'라는 뜻을 가진 '페리'가 결합된 단어로서 '주변 지역'을 의미한다. "갈릴리 사방"은 갈릴리 지역에 국한되지 않는 '갈릴리 주변의 모든 지역'을 의미한다. 이를 누가복음에서는 "그 근처 사방"으로 기록하고 있다. 
(누가복음 4:37)
37 이에 예수의 소문이 그 근처 사방에 퍼지니라
"퍼지더라"에 해당하는 '엑셀덴'의 원형은 '엑세르코마이'이다. 이는 예수님이 귀신을 향해 '나오라'고 명령하실 때 사용된 '엑셀데(25절)'나 귀신이 나올 때 사용된 '나오는지라'에 해당하는 '엑셀덴(26절)'과 동일하다. 동일한 단어가 '사단의 세력의 축소'와 '하나님 나라의 세력의 확장'이라는 대조적 상황에 대해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일종의 언어유희로 볼 수도 있다. 
여기서 예수님의 소문이 온 갈릴리 사방에 퍼져 나간 것은 예수님이 회당에서 나오셨다는 구절(29절)이 미처 기록되기도 전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소문이 얼마나 빨리, 널리 퍼져나갔는지를 생생하게 보여 준다.


29 회당에서 나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As soon as they left the synagogue, they went with James and John to the home of Simon and Andrew.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예수님은 제자로 부르신 어부들, 즉 시몬과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다니셨다.

29절부터 45절까지는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귀신을 쫓으신 후 각종 질병을 고치고 귀신을 쫓는 사역을 바쁘게 행하셨음을 기록하고 있으며 "곧"이란 단어가 이를 잘 표현하고 있다.

"시몬과 안드레의 집"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시몬과 안드레가 한 집에서 살았고, 함께 고기 잡는 일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본래 벳새다 출신이었다.
(요한복음 1:44)
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고기잡는 일을 위해 가버나움 쪽으로 이사를 해서 살았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30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 사람들이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
   Simon's mother-in-law was in bed with a fever, and they told Jesus about her.

시몬의 장모가

"시몬의 장모"가 언급되는 것을 보면 시몬은 기혼자였고, 그의 집에 장모를 모시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집이 시몬과 안드레의 집(29절)이라고 했으므로 안드레는 미혼이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고린도전서에 나타난 바울의 기록을 보면 시몬은 초대 교회 당시에 자신의 아내와 함께 다녔다고 한다.
(고린도전서 9:5)
5 우리가 다른 사도들과 주의 형제들과 게바와 같이 자매 된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이 없겠느냐
초대교회 당시의 기록을 보면 그의 아내가 먼저 순교했다고 한다.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

"열병으로" 시몬의 장모는 열병을 앓고 있었다. 의사 출신인 누가가 기록한 누가복음에는 고열이 동반되는 '중한 열병'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누가복음 4:38)
38 예수께서 일어나 회당에서 나가사 시몬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중한 열병을 앓고 있는지라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
이 열병은 말라리아나 장티푸스, 또는 폐렴 등 고열이 발생하는 병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누웠는지라"에 해당하는 '카테케이토'가 미완료 과거형인 점으로부터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인해 오랫동안 고생한 것을 알 수 있다.

사람들이 곧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고있다는 사실을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께 말씀드렸다. 누가복음을 참고하면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예수께 구하니"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이를 참고하면 동네 사람들은 예수님께 단순히 열병을 앓고 있음을 말씀드렸을 뿐만 아니라 병을 고쳐주시기를 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동네 사람들이 예수님께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에 관해 말씀드린 까닭은 다음과 같이 생각해 볼 수 있다.

① 베드로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을 따라다니는 것을 동네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었다.

귀신을 쫓아낸 예수님이 병도 고칠 수 있는지 보고자 하였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유대인들이 끊임없이 예수님을 향해 '그 일은 했는데 이 일은 할 수 없는가'라고 질문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1:37)
37 그 중 어떤 이는 말하되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이 사람이 그 사람은 죽지 않게 할 수 없었더냐 하더라

이 질문은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도 계속되었다.

(마가복음 15:31)
3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함께 희롱하며 서로 말하되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이러한 질문의 이유는 그들이 지속적으로 예수님께 표적을 구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님께 지속적으로 더 큰 표적, 더 확실한 표적, 더 분명한 표적을 구했다. 이는 어쩌면 유대인들에게는 표적이 의미가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들은 보고서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도 그들에게 표적을 주고자 하지 않으셨다.

(마가복음 8:11-12)
11 바리새인들이 나와서 예수를 힐난하며 그를 시험하여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구하거늘
12 예수께서 마음속으로 깊이 탄식하시며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 세대가 표적을 구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세대에 표적을 주지 아니하리라 하시고


31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So he went to her, took her hand and helped her up. The fever left her and she began to wait on them.

31절을 원어에 따라 직역하면 '(그리고 그가)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그녀를) 일으키셨다. (그리고) 열병이 (그녀를) 떠났다. 그리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들고 있었다.'이다.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으로 누워있던 환자의 모습은 어떠했겠는가를 생각해 보면 이 말씀을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열병의 병명으로 짐작되는 말라리아나 장티푸스의 경우를 예로 생각해 볼 수 있다.

- 말라리아: 전형적인 증상은 두통, 피곤, 근육통, 식욕 부진의 초기 증상이 나타난 후, 수일 내에 오한과 고열, 설사, 복통이 발생하여 체온이 39-41℃로 상승하며 심하게 춥고 떨리는 증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열같은 경우에는 처음에는 매일 불덩이처럼 나게 되지만 피료를 하지 않고 방치하면 점점 각기 다른 주기성들을 보이게 되는데, 열대 말라리아 같은 경우에는 열이 매일 나고, 삼일열 말라리아나 난형열 말라리아 같은 경우에는 48시간 주기로 나타나며, 사일열 말라리아는 72시간에 걸쳐서 나타난다. 열이 심하기 떄문에 열 발작이 발생한다. 열 발작은 크게 오한기, 발열기, 발한기로 진행된다.
오한기: 손이나 온 몸에 힘이 없어서 말하기 힘들고 오한이 발생하게 되며 약 30분-1시간 정도 지속된다.
발열기: 40도 이상의 고열이 발생하고 탈수증상을 보이며 두통과 갈증이 심해진다.
발한기: 체온이 급격하게 정상수치로 변하게 되고 온 몸에 땀이 나며 이로 인해 지쳐서 잠이 들게 된다.

- 장티푸스: 우리나라에서 욕설로 사용되는 염병이 장티푸스이다. 옛날에는 홍수나 기근 등이 발생하면 이 병이 돌아 사망자가 많이 발생하는 무서운 전염병이었다. 초기에는 고열, 오한, 두통이 나타나서 감기로 생각하다가 며칠 뒤부터 복통, 가슴에 붉은 반점 등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고열이 발생하기 전에 수일간 장염 증세로 설사를 하는 경우가 있으며 변비가 생기기도 한다. 장티푸스의 특징은 발열로서 1주 정도에 걸쳐 열이 서서히 올라가다가, 2~3주가 되면 지속적인 고열에 시달리며, 발열을 치료하지 않으면 4-8주까지 지속될 수 있다. 치료를 받지 않은 채로 3-4주 가량 지나면 장천공으로 인한 심한 복통이나 위장 출혈 등의 합병증 위험이 높아지며 이는 복막염으로 이어질 수 있다. 고열이 심해지면 머리카락이 거의 다 빠지는 탈모현상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그 모습이 흉해서 옛날 사람들에게는 이 병의 대표적 이미지로 여겨졌다. 모근이 상하기 때문에 병이 나아도 머리카락이 잘 회복되지 않는다.

예수님께서는 이와 같은 상태로 누워있던 시몬의 장모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다. 증상의 고통스러움과 전염성을 우려하여 누구도 가까이 가려고 하지 않던 시몬의 장모에게 가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는 것이 예수님의 치유행위였다.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열병이) 떠나고"에 해당하는 또한 '떠나고'에 해당하는 '아페켄'의 원형 '아피에미'는 법적인 의미에서 '(남편이 아내를) 버리다 (고린도전서 7:11)', '(제자들이 예수님을) 버리다 (마태복음 26:56)' 등의 매우 강한 의미를 갖는다. 예수님의 손길에 열병이 베드로의 장모에게서 완전히 떠나갔음을 매우 강조하는 문장이다. 여기서는 열병을 인격화시켜 예수님의 신적치유행위가 열병과 시몬의 장모를 완전히 분리시킨 것으로 표현하여 이 기적의 의미를 더욱 강조하였다.

"수종드니라"에 해당하는 '디에코네이'는 '섬기다'는 의미를 지닌 원형 '디아코네오'의 3인칭 단수 미완료 과거형이므로 '그녀가 섬기고 있었다'는 의미로서 섬김의 계속성을 나타낸다. 앞에서 "일으키시니"에 해당하는 '에게이렌'은 부정 과거형이므로 치유행위의 즉각성을 나타낸다. 일반적으로 중병을 앓다가 낫게 되면 회복 기간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손을 잡고 일으키심에 시몬의 장모가 회복기간조차 필요없이 즉각적으로 완전히 기력을 회복했음을 나타낸다. 또한 수종드는 행위가 계속되는 것을 볼 때, 병이 재발하지도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로부터 예수님의 치유는 단지 육체의 회복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며, 치유의 대상자로 하여금 주님 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인격과 영혼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전인적 치유임을 알 수 있다. 우리의 삶에서도 예수님께 무엇을 받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수고와 봉사를 통해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는 데로 나아가는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치유와 구원이다.

이제 이와 같이 치유된 시몬의 장모는 사위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을 따라 다니더라도 가정 내에서 그의 조력자가 될 것임을 알 수 있다.

<안식의 의미> 지금까지 안식일에 이루어진 일들을 통해 '안식'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심으로써 '안식'이 무엇인지를 알려주셨다. 그리고, 회당에 있던 귀신들린 사람으로부터 귀신을 쫓아내심으로써 포로되고 눌린 삶을 벗어난 자유를 보여주셨다. 또한,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서 시몬의 장모의 열병을 고쳐주심으로써 회복의 역사를 보여주셨다. 시몬의 장모는 손을 잡아 일으켜주시는 예수님의 손길에 열병이 떠났고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수종들었다. 복음을 듣게 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손을 잡고 일으켜 주시는 것이다. 복음을 믿는 사람,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자신도 예수님의 손을 잡음으로써 열병이 떠나게 되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어 하나님의 안식에 참여하게 된 사람은 예수님을 수종들며 살게 된다. 요한계시록은 이러한 안식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요한계시록 22:3-5)
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4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32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That evening after sunset the people brought to Jesus all the sick and demon-possessed.

저물어 해 질 때에

예수님의 말씀에 더러운 귀신들이 순종하고 귀신 들린 사람으로부터 쫓겨났다는 소문이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진 것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손길에 시몬의 장모의 열병이 나았다는 소문 또한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졌을 것이다. 이런 기록은 나타나 있지 않으나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소문을 전해 들은 사람들이 시몬과 안드레의 집 앞에 모여들었다.
"저물어 해 질 때에"라는 표현이 사용된 까닭은, 이 날은 안식일이었고 유대인들의 안식일은 금요일 오후 해질 무렵부터 토요일 오후 해질 무렵까지였기 때문에 안식일이 끝나는 때, 곧 날이 저물고 해 질 때가 되어서야 사람들이 모여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시간을 나타내는 데에 마가가 독특하게 기록한 시간에 대한 이중적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저물다"에 해당하는 '읍시아스'와 "해지다"에 해당하는 '에뒤 호 헬리오스'는 일몰을 나타내는 동일한 내용의 표현이지만 반복되어 사용되었다. 이러한 표현은 '밤'을 강조함으로써 예수님의 치유사역이 밤에도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며, 쉬지 않고 일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부각시킨다.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소문을 듣고 모여든 사람들은 귀신을 쫓고 병자를 고쳤다는 소문을 따라 인근의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사람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 "모든"은 어떤 병에 걸린  병자든지, 귀신 들린 어떤 자든지 의지할 수 있고 회복시켜줄 수 있는 분은 예수님뿐임을 나타낸다.


33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
   The whole town gathered at the door,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

32절의 "모든"에 해당하는 '판타스', 여기에 기록된 "온"에 해당하는 '홀레', 34절의 "많은"에 헤당하는 '폴루스' 등의 단어들은 예수님이 제한 받지 않는 권세를 통해 치유를 행하셨음을 나타낸다.

인근의 모든 병자와 귀신들린 사람들, 그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 또한 이들을 보러 온 사람들로 인해 말그대로 '온 동네'가 시몬과 안드레의 집 문 앞에 모였다. 이제 시몬과 안드레의 집은 회당보다 더 유력한 장소가 된 것이다. 그 까닭은 그 집에 예수님이 계셨기 때문이다.


34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and Jesus healed many who had various diseases. He also drove out many demons, but he would not let the demons speak because they knew who he was.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마태복음을 참고하면, 예수님께서는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다" 고치셨고, 또한 많은 귀신들을 "말씀으로" 내어쫓으셨다.

(마태복음 8:16)
16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 내시고 병든 자들을 다 고치시니

마태복음은 이 모든 치유의 사역이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이루신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마태복음 8:17)
17 이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에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

또한 다음의 같은 이사야의 말씀을 참고할 수 있다.

(이사야 53:4)

4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예수님께서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시는 일, 곧 우리의 질고를 지시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실 때, 예수님께로부터는 능력이 나갔다. 이는 5장에 기록된 혈루증을 앓아 온 여자가 나음을 받는 사건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마가복음 5:30)
30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예수님께서 우리의 질고와 슬픔을 당하실 때, 예수님께로부터는 능력이 나가고, 그만큼 우리의 질고와 슬픔이 예수님께로 옮겨지는 것이다.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예수님은 귀신을 내어 쫓으시며, 귀신들이 말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으시는 권세, 곧 하나님의 아들의 위엄과 권세를 지니고 계셨다.

귀신들은 예수님께서 누구신지, 어떤 권세를 갖고 계신지 알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의 위엄과 권세로써 귀신들이 이를 말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셨다. 이는 귀신들의 입을 통해 발설되어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정해진 때까지 자신이 누구인지를 말하지 못하도록 귀신들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도 금하셨다. 이것은 예수님이 누구이신가를 알게 되는 것은 예수님의 사역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반드시 '신앙고백'을 통해서만 말해져야 하는 것이었다. 이 고백은 교회의 기초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말'로서만 발설된다면 하나님의 계획과는 달리 정치적 그리스도 혹은 단순한 유명인으로 변질되어 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예수님의 정체를 알고 있는 귀신들이 이를 발설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엄히 금하셨다.


35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Very early in the morning, while it was still dark, Jesus got up, left the house and went off to a solitary place, where he prayed.

마가는 21절에서 38절까지의 구절에 낮 (21-31절)과 해질녘 (32-34절)과 새벽녘 (35-38절)에 이르는 하루의 이야기를 모두 기록하고 있다. 마가가 시간에 대한 이중적 표현을 통해 시간을 강조하는 것은 예수님의 사역이 쉴새없이 매우 바쁘게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는 마가가 독특하게 기록한 시간에 대한 이중적 표현이다(32절 참조). "새벽"에 해당하는 '프로이'는 유대인의 시간 기준으로 계산하면 네번째 밤, 즉 새벽 3시부터 새벽 6시 사이의 시간을 말하며, "밝기 전에"에 해당하는 '엔뉘카'는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 시간을 말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른 새벽, 아직 어두울 때에 일어나셨다. 각색 병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고 많은 귀신을 내어쫓으시는 일 자체도 매우 힘든 일이었을 것이며, 또한 사람들이 저물어 해질 때에 모였다면 일찍 주무실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이 때에 일어나셨다. 남들이 편히 쉬는 시간에도 반드시 하셔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9-10절에는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실 때 세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일이 기록되어 있다.

(마가복음 1:9-10)
9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10 곧 물에서 올라 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성령이 비둘기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누가복음은 이 부분을 확대하여 보다 상세히 기록했다.

(누가복음 3:21)
21 백성이 다 세례를 받을새 예수도 세례를 받으시고 기도하실 때에 하늘이 열리며

예수님께서는 세례를 받으실 때 기도하셨다. 기도하실 때에 성령이 임하셨고,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누가복음 3:22)
22 성령이 비둘기 같은 형체로 그의 위에 강림하시더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기도를 통해 성령의 충만을 받으시고, 하나님과 교통하셨음을 볼 수 있다. 이 땅에서의 사역을 기도로써 시작하신 것이다.

이후 마가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사역을 하시는 동안 기도하시는 장면이 세 번 등장한다. 기도의 시간은 여기서는 새벽 무렵이고, 6:46에서는 날이 저문 후이고, 14:32-42에서는 한밤중이다. 기도하실 때는 혼자 기도하시거나, 제자들이 있을 때에도 따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다. 또한 사역 초기에, 사역 중간기에, 그리고 사역 말기에 기도하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는 늘 기도하셨고, 큰 일을 앞두고 계실 때에는 더욱 열심히 기도하셨다. 예수님의 기도는 은밀한 중에 하나님과의 교통을 통해 사역의 힘을 얻기 위한 기도였다.
본 구절의 기도의 
시간은 새벽 미명, 장소는 한적한 곳이다. 새벽 미명의 시간은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 곧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확장, 창조해 나가시는 일, 병자와 귀신들린 자들을 새롭게 만드시는 일을 시작하시기 전의 시간이며, 한적한 장소는 사람들이 없는 장소, 곧 하나님과 함께 하시기에 가장 좋은 장소이다. 이는 곧 '태초'를 상징하며,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와 기도로써 교통하셨음을 나타낸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도 그 기도를 계속하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상에서 영혼을 하나님께 부탁드리는 기도로써 이 땅에서의 모든 사역을 마치셨다.

(누가복음 23:46)
46 예수께서 큰 소리로 불러 이르시되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하고 이 말씀을 하신 후 숨지시니라

예수님께서는 사역의 시작을, 그리고 사역을 하시는 동안에, 그리고 사역을 끝을 기도로써 감당하셨다.

"기도하시더니"에 해당하는 '프로세위케토'는 '프로슈코마이'의 미완료 과거형이다. 헬라어의 미완료 과거형은 과거 사실의 반복과 계속을 나타내므로 예수님께서 장시간 동안 계속 기도하셨음을 알 수 있다.


36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Simon and his companions went to look for him,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은 우선적으로 시몬과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시몬의 이름이 가장 먼저 언급되는 이유는 ①마가복음은 시몬의 설교를 바탕으로 기록되었기 때문 ②시몬의 급한 성격으로 인해 늘 앞에 나섰기 때문 ③예수께서 시몬의 집에서 머물고 계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그의 집 앞에는 밤늦게까지, 또한 새벽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데리고 와서 모여있었을 것이므로 집주인인 그가 자기 집에 머물고 계신 예수님을 찾는 일에 가장 앞장 섰을 수도 있다.

예수의 뒤를 따라가

"뒤를 따라가"에 해당하는 '카테디옥센'은 '쫓다'라는 의미의 '디오코'와 '~을 따라’라는 뜻을 가진 전치사 '카타'가 결합된 '카타디오코'의 부정 과거형으로사 '기어코 쫓아 가다', '추격하여 따라붙다'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즉 이는 '상대방의 의지와 무관하게 기어코 따라 붙어 성가시게 하다'라는 매우 부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시몬 일행이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 한적한 곳으로 가신 예수님을 기어코 따라간 것은 사역을 준비하시는 예수님을 방해하는 행위였다. 아직까지 그들은 스승의 뜻을 헤아리는 성숙한 제자의 모습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


37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and when they found him, they exclaimed: "Everyone is looking for you!"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예수님께서는 귀신들이 예수님에 대해 말하는 것을 엄히 금하셨다(25절, 34절). 그러나 많은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신 예수님의 소문은 이미 순식간에 갈릴리 인근 지역으로 퍼져 나갔다. 질병의 치료, 귀신 들린 자의 회복뿐만 아니라 나아가서 메시야에 대한 기대감으로 온 동네 사람들은 흥분해서 예수님이 머물고 계신던 시몬의 집 앞에 모여들었고, 이러한 상황에 대해서 시몬 또한 흥분했을 것이다. 그래서 시몬은 예수님을 찾아와 이 상황과 이로 인한 사람들과 자신의 흥분을 그대로 예수님께 전달한다. 또한 그들의 기대에 부응해 주실 것을 요청했을 것이다. 그러나 귀신들에게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을 엄히 금하신 것과 같이 이 일은 예수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니었고, 예수님의 사역과도 배치되는 일이었다.


38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Jesus replied, "Let us go somewhere else--to the nearby villages--so I can preach there also. That is why I have come."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예수님께서는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15절)"는 말씀을 전하셔야 했다.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기 위해 한 것에만 머물러 계실 수는 없었다. 사역의 시간은 한정적이었기 때문이다. 
"가까운"에 해당하는 '에코메나스'는 거리상 가깝다는 의미보다 '다음의' 또는 '이웃의'라는 뜻이 있다.
"마을"에 해당하는 '코모폴레이스'의 원형 '코모폴리스'는 규모가 작은 '촌락'을 의미한다. 규모가 큰 '도시'를 가리키는 '폴리스'와는 구분된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에 따르면 당시 갈릴리 지방에는 수천명이 사는 촌락만하더라도 200여 개에 이르렀다고 하며, 예수님께서는 작은 촌락 하나까지도 소홀하게 생각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이 구절은 예수님께서 가버나움의 시몬의 집 앞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가지 않으신 이유를 알려준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시기 위함이었다.
예수님은 마가 당시의 헬레니즘 세계에 많이 출몰했던 '신적 인간'과는 다른 분이다. 기적과 이적을 통해 부와 인기를 얻으려는 '신적 인간'은 사도행전에서도 볼 수 있고, 지금도 이단과 사이비로 존재하고 있다. 이런 자들은 교회 안까지 영향을 미쳤고,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에 대한 그릇된 이해를 유도했다. 그러나 마가는 본문을 통해 예수님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기 위해 오신 하나님의 거룩한 자이심을 분명히 증거하고 있다.
"내가... 왔노라"에 해당하는 '엑셀돈'의 원형 '엑세르코마이'는 '~로부터 나오다'라는 의미이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시다.


39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
   So he traveled throughout Galilee, preaching in their synagogues and driving out demons.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이에"에 해당하는 접속사 '카이'는 앞 절의 말씀에 따라 예수님께서 사역을 행하셨음을 나타낸다.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는 예수님의 초기 사역이 지리적으로 갈릴리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잘 보여 준다.
이는 또한 21절에서 가버나움과 관련하여 논한 바와 같이 이 말씀은 곧 '빛'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흑암' 가운데 놓인 '사망의 그늘진 땅'을 두루 다니셨음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세상의 빛이시며, 갈릴리는 흑암 가운데 놓인 사망의 그늘진 땅, 곧 죄악으로 인해 죽음을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의 세상을 대표한다.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여러 회당에서"에 해당하는 원문은 '에이스 타스 쉬나고가스'로서 '여러 회당들 안으로'라는 의미이다. 예수님께서 쉬지 않고 바쁘게 다니셨음을 나타내는 표현이다.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

"또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는 "전도하시고"와 매우 밀접하게, 또한 대등하게 이어지고 있다. 예수님께서 귀신을 내쫓으신 것은 전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또한 전도만큼 중요한 일로 보여진다.
이는 귀신 들린 사람을 불쌍히 여기신 까닭이기도 하지만, 또한 이 일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 인간들을 죄의 권세 아래 복종시키려는 사단을 세상에서 물리치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기 위함이기 때문이다.
"내쫓으시더라"에 해당하는 '에크발론'의 원형 '에크발로'는 강제적 힘에 의해 '제거하다', '축출하다', '끄집어 내다'라는 매우 적극적인 의미를 지닌다. 이러한 표현을 통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세와 능력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이 땅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확장시켜 나가시는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40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A man with leprosy came to him and begged him on his knees, "If you are willing, you can make me clean."

한 나병환자가 예수께 와서
이 치유의 기록은 마태복음 8:1-4과 누가복음 5:12-16에도 등장한다. 마태복음의 기록에 의하면 이 기적은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을 마치고 산에서 내려 오실 때에 일어난 일이다.
"나병환자"에 해당하는 '레프로스'는 오늘날의 한센씨병이라기보다는 일종의 피부병으로 여겨진다. 이 병에 걸린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격리되어 생활해야 했으며, 부정한 자로 취급되어 종교적으로도 배척을 받았다. 그러나 이들이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일은 제한적으로 허용되어 회당 한 구석의 칸막이 너머에 모여 예배를 드 렸다.
귀신을 쫓아 내신 기적, 열병을 고치신 기적은 그 증상들이 직접적으로 눈의 보이지 않지만, 나병환자의 경우에는 누구나 쉽게 눈으로 보고 인지할 수 있는 질병이다. 예수님의 기적은 점차적으로 보다 분명한 형태로 드러나고 있다. 
"예수께 와서"는 이 사람이 큰 용기를 내어 예수님을 찾아왔음을 나타낸다. 또한 병자 스스로가 개인적으로 예수님께 나아온 최초의 기록이다. 이 행위는 사회적으로 격리의 대상인 나병환자는 먼저 정상인에게 다가가서는 안 된다는 당시의 율법 조항을 어기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자신의 병으로부터 구원을 얻는 문제가 가장 크고 중요한 문제였으므로 과감하게 예수님께 나아간 것이다. 문제를 가지고 있다면, 예수님을 믿음을 지니고 예수님께 나아가야 한다. 이 나병환자는 본 구절을 통해 믿는 자의 바른 태도를 보여준다.
꿇어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꿇어 엎드려"에 해당하는 '고뉘페톤'은 '무릎을 끓었다'는 뜻이다. 누가복음에서는 "엎드려"라고 기록되어 있다.
(누가복음 5:12)
12 예수께서 한 동네에 계실 때에 온 몸에 나병 들린 사람이 있어 예수를 보고 엎드려 구하여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나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니
또한 마태복음에서는 "절하고"라고 기록되어 있다. 
(마태복음 8:2)
2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절하며 이르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어떤 표현이든지, 나병환자는 예수님께 와서 극도의 존경심을 표현하고 있다.
나병환자의 모습은 겸손하게, 간절히 구하는 것이 믿는 자의 바른 태도임을 보여준다.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원하시면"에 해당하는 '에안 델레스'는 현재형이다. 이는 나병환자가 예수님께는 병을 고치는 능력이 있으며, 또한 지금 당장 낫게 하실 수 있는 분으로 믿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하실 수 있나이다"에 해당하는 '뒤나사이'도 현재형이다. 이는 나병환자가 예수님께는 병을 고치는 능력이 있으며, 또한 지금 당장 낫게 하실 수 있는 분으로 믿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깨끗하게"에 해당하는 '카다리사이'는 '육체의 불결함이 깨끗해지다', '도덕적, 종교적 정결해지다'라는 표현이다. '고치다', '치료하다'에 해당하는 사용하지 않았다. 이는 나병환자에게는 육체적 고통보다는 오히려 도덕적, 종교적으로 부정하게 취급받는 것이 더 큰 문제였음을 나타낸다.
나병환자는 예수님께서 원하기만 하셔도, 다른 특별한 일이 아니라 그저 생각만 하셔도 자신의 병이 나을 것이라고 말하는 큰 믿음을 고백하고 있다. 나병환자의 모습은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알고 절대적인 믿음으로 구하는 것이 믿는 자의 바른 태도임을 보여준다.


41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Filled with compassion, Jesus reached out his hand and touched the man. "I am willing," he said. "Be clean!"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

"예수께서 불쌍히 여기사"라는 구절은 본래 '그리고 그의 마음이 감동되어서'이다.
"불쌍히 여기사"에 해당하는 '스플랑크니스데이스'의 원형 '스플랑크니조마이'는 원래 인간의 '내장'을 가리키다가 점차 '사랑'이나 '애타는 마음'이란 뜻을 갖게 된 '스플랑크논'에서 유래하였으며 찢어질 듯한 마음을 의미 한다. 
여기서는 특별하게 예수님의 감정이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사건을 목도하고 전해준 베드로가 이 때의 예수님의 모습을 면밀히 지켜보았고, 나병환자를 불싼히 여기신 예수님의 감정이 겉으로 드러날 만큼 명확했으며, 이 일이 베드로에게 무척 인상깊게 남았기 때문일 것이다.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나병환자를 불쌍히 여기신 예수님은 손을 내밀어 그에게 손을 대셨다. 이는 시몬의 장모를 고치실 때의 모습과 흡사하다. 예수님께서는 전염성을 우려하여 누구도 가까이 가지 않던 시몬의 장모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다(31절). 손을 통해 예수님의 마음이 전달되고 능력이 나간 것이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내가 원하노니"라는 마음으로 예수님께서는 나병환자에게 손을 대신 것이다. 이는 또한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는 나병환자의 믿음의 고백에 응답하신 것이기도 하다. 이는 나병환자가 큰 믿음을 갖고 왔다는 사실과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42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Immediately the leprosy left him and he was cured.

이 표현은 예수님께서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고 말씀하시자마자 그 즉시 즉각적으로, 그 자리에서 곧 바로, 크고 놀라운 일이 나타났음을 나타낸다. 어떤 일의 발생의 즉각성을 통해 예수님의 능력을 나타내며, 예수님의 치유가 신적치유임을 나타내고,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드러낸다.

나병이 그 사람에게서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떠나가고"에 해당하는 '아펠덴'의 원형 '아페르코마이'는 '(시몬의 장모에게서 열병이) 떠나고(31절)’에 해당하는 '아페겐'의 원형으로서 법적 또는 인격적 분리를 의미하는 '아피에미'와 다르다. ‘아페르코마이’는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35절)'에서 ‘가다’라는 동사와 동일하며, 장소를 이동한다는 의미의 말이다. 예수님께 나아온 나병환자의 병이 예수님의 말씀의 권세에 의해 즉각적으로 떠나갔음을 나타낸다.
제사장은 문둥병자를 정죄하고 격리하는 일밖에 하지 못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사랑하시고 위로하시며 병을 고쳐주시는 분이다. 신뢰하고 따라야 할 진정한 지도자요, 질병으로부터 나음을 주시는 구주이시며, 따라서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분은 예수님이심을 알 수 있다.

(요한복음 14:6)

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는 예수님이 나병환자를 고치신 치유의 결과이다.
이 치유의 결과가 누가복음에는 '떠나니라' 라고 기록되어 있다.
(누가복음 5:13)
1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나병이 곧 떠나니라
또한 마태복음에는 치유의 결과가 '깨끗하여진지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마태복음 8:3)
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이르시되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시니 즉시 그의 나병이 깨끗하여진지라
이와 달리 마가복음의 기록은 보다 상세한 설명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또한 이 일을 목도한 사람이 큰 감동을 느꼈고, 이 일이 큰 인상을 남겼음을 알 수 있다.


43 보내시며 엄히 경고하사
   Jesus sent him away at once with a strong warning:

곧 보내시며

"곧 보내시며"는 나병환자가 치유되자 즉시 그를 보내셨음을 의미한다. 나병환자가 치유되었다는 소문에 사람들이 주위로 몰려들 것을 염려하신 것이다. 기적의 소문이 늘어갈 수록 예수님의 사역의 본질은 왜곡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광야에서의 시험을 이기시고 늘 기도하시며 하나님과 교통하시는 예수님께는 그럴 우려가 없지만, 세상의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구원사역과 동떨어진 생각을 품고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일부 목회자들이 목회사역에 있어서 왜곡되고 비성경적인 길을 향해 가는 것은 시험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님과 교통하지 못하며,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엄히 경고하사

"엄히 경고하사"에 해당하는 '엠브리메사메노스'는 전치사 '엔'과 '브리메'라는 단어의 합성어이다. 이 단어는 원래 '(성미가 급한) 말이 거칠게 콧김을 내뿜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단어는 '책망하다(마가복음 14:5)'로 번역되거나 '비통히 여기다(요한복음 11:33)'로 번역될 만큼 강한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다. 원문에는 '엄히'에 해당하는 말이 없지만, 이러한 뉘앙스를 살리기 위해 '엄히'가 도입되었다.
한글번역에서는 원문의 '그리고'에 해당하는 '카이'나 '그에게'에 해당하는 '아우토'를 번역하지 않았다. 원문대로 번역하면 '그리고 그는 그에게 강력히 경고하사 곧 그를 보내시며'가 된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병을 고쳐주신 사실을 알리지 말도록 나병환자에게 엄히 경고하신 이유는 무엇일까?
①첫째는 예수님의 사역의 본질을 왜곡시키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예수님의 사역의 본질은 기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확장시키고 사람들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었다.
(요한복음 10:10)
10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따라서 이 본질이 흐려져서는 안되었다. 시몬 일행이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찾아온 일은 이러한 우려를 보여주는 것이다.
②둘째는 아직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기적을 베풀어 유명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서 고백되어야 하는 분이셨다. 이 일은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방해하는 철없는 제자 베드로의 입을 통해 마침내 고백된다.


44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라
  "See that you don't tell this to anyone. But go, show yourself to the priest and offer the sacrifices that Moses commanded for your cleansing, as a testimony to them."

이르시되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예수님께서 엄히 경고하신 말씀의 내용이다.

"아무에게 아무 말도"는 나병의 치유와 관련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런 정보도 알리지 말 것을 나병환자에게  엄히, 각별히 강조하시는 구절이다.

가서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나병이 나은 사람은 규례에 따라 자신이 병이 나았음을 먼저 제사장에게 보이고 확인받아야 했다.
(레위기 13:17)
17 제사장은 그를 진찰하여서 그 환부가 희어졌으면 환자를 정하다 할지니 그는 정하니라

네가 깨끗하게 되었으니 모세가 명한 것을 드려 그들에게 입증하라 하셨더라

"네가 깨끗하게 되었으니"는 병자 본인의 착각이나 억지가 아니라, 예수님의 치유가 실제로 완전하게 이루어졌음을 나타낸다. 나병환자의 완치를 공적으로 확인해 주던 제사장에게 보이고 완치를 확인받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상태가 된 것이었다. 이제 이 병자는 적법한 절차를 거쳐 유대인 공동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음을 입은 우리가 깨끗함을 인정받아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모세가 명한 것"이란 모세의 율법에 부정한 자가 정결하게 되었을 경우에 제사장에게 가서 드려야 할 제물들을 가리킨다. 정결 의식이 기록된 레위기의 규례를 보면, 이는 살아 있는 새 두 마리, 백향목, 홍색 실, 우슬초였다.
(레위기 14:4) 
4 제사장은 그 정결함을 받을 자를 위하여 명령하여 살아 있는 정결한 새 두 마리와 백향목과 홍색 실과 우슬초를 가져오게 하고
그리고 8일 후에는 어린 숫양 두 마리, 일 년 된 암양 한 마리, 소제물, 기름을 드렸다.
(레위기 14:10)
10 여덟째 날에 그는 흠 없는 어린 숫양 두 마리와 일 년 된 흠 없는 어린 암양 한 마리와 또 고운 가루 십분의 삼 에바에 기름 섞은 소제물과 기름 한 록을 취할 것이요
이는 예수님께서 율법을 파괴하거나 부정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율법을 완전케 하기 위해 오셨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마태복음 5:17)
17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


45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Instead he went out and began to talk freely, spreading the news. As a result, Jesus could no longer enter a town openly but stayed outside in lonely places. Yet the people still came to him from everywhere.

그러나 그 사람이 나가서 이 일을 많이 전파하여 널리 퍼지게 하니 

"많이"에 해당하는 '폴라'는 성경의 다른 본문에서 '오랜 시간이 흐르다', '늦은 시각이 되다' 또는 ‘크게’ 등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많이 전파하여"는 예수님께서 나병의 치유와 관련한 정보를 알리지 말도록 엄히 경고하셨지만, 나병환자는 이 말씀을 따르지 않았음을 나타낸다. 자신의 병으로 인하여 자신을 부정한 자라고 멸시하고 소외시켰던 사람들에게 자신이 병고침을 받게 된 이야기를 오랫동안, 큰 소리로, 여러 사람에게 전하고 다녔던 것이다. 
"널리 퍼지게 하니" 나병환자가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은 까닭에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의 소문이 다시 한 번 물결치듯 인근 지역에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주변 지역에 소문이 퍼졌으므로 예수님을 알아보고 모여드는 사람들이 많이 생겼다. 예수님 자신을 알아볼 사람들이 많은 동네에는 들어가실 수가 없었고, 따라서 동네에 들어가 희당을 중심으로 복음 전파를 하실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러한 일은 예수님께서 바라시던 바가 아니었고, 오히려 이 일이 예수님의 복음전파의 사역에 방해가 되었음을 나타낸다.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셨으나 사방에서 사람들이 그에게로 나아오더라

나병환자였던 사람이 전한 이야기를 듣고 예수님께로부터 병고침을 받고 귀신을 쫓아내주시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았으며, 그들에게는 절실한 일이었으므로 동네에 들어가지 않으셨음에도 어떻게든 예수님을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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