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오면서 대단히 많은 책을 읽지는 않았고...다만 어릴 적에 계몽사에서 나온 50권짜리 소년소년세계명작 만큼은 주구장창 읽었다. 감정이 아직 무른 어릴 적에 읽은 책들이라서 그런지...그 이야기들은 전집이었다는 특징과 맞물려 지금도 머리 속 책장에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고, 또한 아련한 어릴 적의 기억들과 맞물려 사진첩처럼 마음 속에 간직되어 있다.
책 이야기를 꺼내니...가슴을 후벼파는 감동과 함께 살아가는 방향을 잡도록 이끌어 준 책들이 떠오른다.
A. J. 크로닌의 성채...중학교 1학년 때 선생님께서 선물해 주신 그 책을 읽고 삶에 필요한 용기를 생각함과 동시에, 인생에서는 때때로 계단을 헛디딜 때 느끼는 가슴 철렁함을 만날 수도 있음을 알고...어른이 된다는 것은 부조리와 맞설 수 있는 용기, 또한 그에 못지 않게 삶의 슬픔을 견딜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체계적으로 생각해 보았다. 이 책은 내가 약한 중도비관론 성향을 갖는데 영향을 준 것 같다.
영웅문과 천룡팔부...남을 속이고 이용하는 얕은 꾀로서 세상을 살기보다는 내 입의 말 한 마디도 지켜내는 신의로서 세상을 살아가고자 뜻을 정하도록 도와준 책이다. 영웅문 주인공들(곽정, 양과, 장무기)의 이와 같은 삶의 방식을 보며 느꼈던 무한한 감동은 '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다'라는 격언과 더불어 나이를 먹음에 따라 말수가 적어지는데 영향을 끼친 듯 싶다. 그리고, 천룡팔부에 나오는 '아아..마침내 당신은 오셨군요'라는 가슴벅찬 대사는 삶에 있어서 오직 한 명에게만 내 마음을 바치고 살아야 함을 다짐하게 만들었다. 이런 책들의 영향인지...내 타고난 성정 탓인지...좀 고지식한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점도 내가 받은 영향의 일부일 듯 싶다.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만났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읽었던 이야기 중에 가장 입맛 다시게 만들었던 이야기는 단연! 도술부리는 '홍길동'과 '전우치', 아슬아슬한 모험 끝에 어마어마한 보물을 찾아내는 '보물섬', 원하는 건 뭐든지 (로크새의 알만 빼고) 들어주는 거인이 등장하는 '알라딘의 요술램프'였다. 현실적이지 않은 동화지만...이 이야기들이 어릴 적 나를 얼마나 들뜨게 했는지. 정말 찾고 싶고, 만나고 싶고, 갖고 싶었다. 실제 현실에서는 어렵다는 것을 알았지만, 어떻게든, 우연히라도 찾고 싶고, 만나고 싶고, 갖고 싶었다. 후에 어느 책에서 소년시절의 이와 같은 바램은 정신적으로 건강한 것이라는 글을 보고 내 정신건강에 안심할 정도였다.
그런데, 나이를 먹으면서 살다보니...이 이야기들이 전혀 얼토당토 않은 것이 아니었고, 실은 마치 파랑새처럼...내 주변에 존재하는 것이었다. 식상한 표현이지만, 램프의 거인은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돈의 역할이었다. 자본주의가 발달함에 따라 돈의 힘은 점점 램프의 거인에 수렴해가는 것으로 보인다.
보물섬은...굳이 해적들에 휘말려 목숨이 위태로운 모험을 하지 않고서도...동네 로또판매점을 탐험하면 되는 것이었다. 물론, 엄청난 행운인 만큼, 위험하지는 않은 대신...확률은 매우 낮다.
홍길동과 전우치가 어렵사리 배웠을 도술은 시대가 바뀌고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어느새 일상생활에서 가전용품의 형태로 전혀 감동을 못주며 쓰이고 있다. 도술 중의 상당수는 아마도 스마트폰이나 주방가전제품들이 해결해 줄 듯 싶다.
이 도술 중에서도 가장 신비롭던 것이 축지법이었다. 초등학교 1~2학년 때 즐겨보던 어린이잡지(소년중앙?)의 만화(꺼벙이? 콩돌이?)에 축지법의 원리가 나와있어서 이를 이해하기 위해 매우 관심을 기울였다. 부채접기로 접은 종이 위에서 한걸음을 내디딘 후 접힌 종이를 펴면 많은 거리를 이동하게 된다는 원리라는데...상대성 이론을 도입해서 설명하려던 것이었을까 싶기도 하지만, 아무튼 한 동안 그 억지스런 원리를 고민했던 기억이 난다. 정말 침을 흘릴 정도로 부럽고, 신기묘묘하게만 보이던 이 도술을 나로 하여금 발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자동차'다. 두 손으로 땅을 짚고 무릎을 굽힌 후 멀리 앞을 내다보고 힘껏 땅을 박차 다리를 부지런히 놀려도 목표한 곳까지 닿기에는 나는 너무나도 느리고 힘은 얼마나 드는지. 그렇지만, 자동차의 문을 열고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고 멀리 앞을 내다보고 악셀을 밟기만 하면...주변이 빠르게 다가왔다 금새 뒤로 사라지며 나는 어느새 내가 목표한 곳에 도달한다. 아, 나는 축지법을 쓴 것이다. 정말 감동스럽다.
자동차 회사에서 일하고 있다. 자동차가 좋으니, 자동차를 만드는 회사에서 일하는 것이 좋다. 게다가 운좋게 몇 년에 한 번씩 업무가 바뀌니 싫증이 나지도 않는다. 차를 만들기 위해, 그것도 지속적으로 많이 만들기 위해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니 더더욱 즐겁다.
뭐...실제로는 항상 이렇지만은 않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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