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속에 잠깐 스쳐가는 말씀 한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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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각 한 조각

인격적인 하나님

아리마대 사람 2017. 12. 7. 11:36

극적으로 교회를 새로 다니게 된 사람, 또는 소위 '선데이 크리스천'으로 교회를 다니다가 극적으로 믿음이 깊어진 사람들이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설명하는 데에 자주 쓰는 말이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이다.

요즘은... 이런 말을 듣는 빈도가 점차 줄어드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그 뿐만 아니라 많은 수의 교회들에서는 다음 세대인 아이들, 학생들이 줄어든다고도 한다. 말씀에 따라서일까...?

 

(로마서 11:25)

25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면서 이 신비를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 신비는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오기까지 이스라엘의 더러는 우둔하게 된 것이라

 

'하나님을 만났다'는 사람들이 점차 줄어드는 것처럼 느껴지는 지금의 상황을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이방인의 충만한 수는 거의 채워졌고, 이스라엘은 이제 우둔함을 벗어버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고해서 이방인의 수가 충만해진 것은 아닌 것 같다. 여전히 성령님께서는 일하고 계신다. 이전보다 자주 듣지는 못하지만, '하나님을 만났다'는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만났다'는 사람들로부터 자주 듣게 되는 말은 ' "인격적인" 하나님을 만났다'는 것이다.

'인격적인 하나님'

이 말은 어떤 뜻인지 몹시 궁금했다...

이 말은 어떤 뜻인지...

이 말은...

'인격'이란 '사람으로서의 품격'이라는 뜻이니 '인격적인 하나님'이라는 표현은 하나님을 우리의 모습으로 끌어오는 표현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습으로 끌려오시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습을 따르고 계신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의 모습을 따라 지어졌기 때문이다. 

 

(창세기 1:26-27)

26 하나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들로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가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27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의도와 과정에 따르면, 명백히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은 것이다.

사람은 얼마나 교만한지, 그 교만이 지나쳐 때로는 매우 어리석은 생각과 말을 하기도 한다.

매우 어리석은 말과 행동의 대표적인 사례가 '왜 하나님 아버지라고만 불러야 하느냐', '왜 하나님을 남자라고만 생각하느냐'는 주장이다. 사람이 남자와 여자로 나눠어져 있고, 이에 따라 아버지와 어머니로 불리다보니 이 개념을 하나님께도 적용하고자 하는 것인데, 실로 가당치않은 주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사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실 뿐이다. 부모와 같이 우리를 돌보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를 뿐이다. 굳이 근거를 생각해 보자면, 하나님 자신의 형상을 따라 남자인 아담을 먼저 만드셨으니, 하나님께서는 아버지쪽에 좀 더 가까운 뿐이 아니실까 싶어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를 뿐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신 것 뿐이지, 하나님 스스로가 남자나 여자인 분은 아니시다. 남자와 여자는 피조물인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구분인 것이다. 심지어, 사람도 훗날에는 천사들과 같은 존재가 될 것인데 말이다.

 

(마태복음 22:30)

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일부 사이비나 이단들, 일부 잘못된 주장을 하는 이들이 '하나님 어머니'라고 부르고 '왜 하나님은 남자여야만 하느냐'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을 사람으로 끌어내리는 교만에서 비롯된 행동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인격적인 하나님'이라는 표현에 대해 위와 같은 관점에서 소매를 걷고 따지고 들 수도 있겠지만, 이 표현은 진지하고 성실한 믿음의 고백 가운데 사용되는 표현이므로 위와 같이 교만에서 비롯된 말은 분명히 아닐 것이다.

어쩌면... 하나님을 몹시 친근하게 느낀 데서 비롯된 어린아이같은 고백이 아닐까 싶다.

어린 아기들은 자신이 아빠, 엄마와 닮았음을 얘기할 때 '나는 아빠를 닮았다', '나는 엄마를 닮았다'라고 말하지 않고, '아빠가 나를 닮았다', '엄마가 나를 닮았다'라고 말한다. 족보에 대한 개념이나, 유전학에 대한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그저 중요한 것은 '닮았다'는 점과 그로 인해 갖게 되는 '정서적인 안정감'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나를 닮았다'는 수준의 '인격적인 하나님'이라는 표현도 실은 '내가 하나님과 닮았다'는 인정과 그로 인해 안정감을 가질 수 있기에 사용하는 말이 아닐까 싶다.

또한, '인격적인 하나님'이라는 말은 '마치 사람처럼 가깝게 느껴지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났다는 고백이 아닐까 싶다. 살아있는 존재로서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대상이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만드시고 역사를 이끌어 가시지만, 큰 세상과 긴 역사의 극히 작은 부분을 살아가는 인간은 눈 앞의 것들만 보고 살 뿐, 세상의 크기와 역사의 길이를 짐작할 수 없기에 하나님을 찾지 못하고 살아간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인간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하지 않고 살아간다. 그런데, 눈을 크게 떠 큰 세상과 긴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깨달았을 때, 또는 그 가운데서 나의 삶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깨달았을 때, '인격적인 하나님'이라고 고백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계시는지조차 몰랐던 하나님, 또는 살아계시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하나님, 또는 내 삶과는 무관할 정도로, 너무나 멀리 계신 '신'으로서만 생각해왔던 하나님을 마치 '내 주변에서 살아가는 다른 이웃'처럼, 한걸음 더 나아가 '어릴 적 부모님의 따스한 품'처럼 지극히 가까운 곳에서 나를 돌보시는 분으로 깨달았다는 고백이 아닐까 싶다.

하나님을 찬양함에 있어 그분의 크심을 따라 고백하자면 끝이 없다. '광대하신 하나님'이라는 표현도 그저 막연하고 작을 뿐이다.

 

(느헤미야 8:6)

6 에스라가 광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였느니라

 

오히려, '인격적인 하나님'이라는 표현이 어린아이와 같이 작고 소박한 고백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성탄제'라는 시에서 김종길 시인이 고백하듯이...

 

아,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 오신
그 붉은 산수유 열매―

 

나는 한 마리 어린 짐승,

젊은 아버지의 서느런 옷자락에

열로 상기한 볼을 말없이 부비는 것이었다.

 

한 마리 어린 짐승과 같은 나와 늘 함께하시는 인격적인 하나님...

매 순간 '인격적인 하나님'의 서느런 옷자락에 볼을 부비며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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