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속에 잠깐 스쳐가는 말씀 한 조각

말씀 한 조각 만으로도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 생각 한 조각

유대인 (1) - 시기와 질투

아리마대 사람 2019. 5. 15. 20:32

어릴적 본 사극에서 특별하게 기억에 남는 것은 시어머니가 갓 시집온 며느리에게 훈계하는 장면에서 자주 듣게되던 '투기'라는 단어이다. 투기란 질투와 같은 말로서, 아마도 질'투'와 시'기'로부터 조합된 단어가 아닐까 싶다.

투기는 칠거지악 중의 하나이니 여자는 투기하면 안된다고 훈계를 하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데, 그런 장면이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것은 당시 사극 드라마가 많았고 사극을 좋아하셨던 할머니를 따라 사극을 자주 시청한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집온 여자가 저지르면 친정집으로 돌려보낸다는 일곱 가지의 심각한 죄악인 칠거지악에 굳이 투기를 포함시켰던 까닭이 어이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사극 상에서 언급되던 칠거지악은 사극 내에서는 성경의 십계명과 같은 정도로 취급되던 것이었고, 드라마 속 며느리들에게는 마치 유대인의 율법과 같은 것이었다. 몹시 엄격하고 엄숙한 얼굴로 이것을 가르치던 시어머니 배역 연기자들의 연기력 덕분인지 사극을 보는 동안은 칠거지악이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것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사극에서, 그리고 사극이 대표하는 양반제 사회 하에서 여성에게 투기를 금지한 이유가 일부다처제를 허용했기 때문이며, 일부다처제 하의 가정에서 발생될 문제를 예방하고 일부다처제를 편리하게 지속적으로 운영하기 위해 이를 죄악시했다고 생각하면 우스울 따름이다. '적반하장'이라는 단어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지난 주 동안 유대인들을 초청한 집회에 참석했다.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인 '메시아닉쥬' 목사님들과 찬양사역자들을 초청한 집회였는데, 유대인 목사님들이 말씀을 전하는 가운데에 '모쪼록 이스라엘을 시기나게 해달라'는 내용이 있었다.

 

(로마서 11:11)
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이 말씀의 '시기'라는 단어때문에 어릴 적 보았던 사극에서 언급되던 칠거지악 중의 투기라는 단어가 스쳐갔던 것이다. 사극 상의 시어머니는 투기, 곧 시기와 질투가 엄청난 범죄인 양 말했지만, 생각해 보면 성경은 질투에 대해 매우 관대하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다.

 

(신명기 4:24)
24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

 

(신명기 6:15)
15 너희 중에 계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즉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진노하사 너를 지면에서 멸절시키실까 두려워하노라

 

하나님께서 '질투하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 내용은 구역에서만 볼 수 있는 표현이다.

친절하고 상세한 성경말씀은 하나님께서 무엇에 대해 질투하시는지도 기록하여 알려주고 있다. 

 

(출애굽기 20:5)
5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출애굽기 34:14)
14 너는 다른 신에게 절하지 말라 여호와는 질투라 이름하는 질투의 하나님임이니라

 

(신명기 29:18-20)

18 너희 중에 남자나 여자나 가족이나 지파나 오늘 그 마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떠나서 그 모든 민족의 신들에게 가서 섬길까 염려하며 독초와 쑥의 뿌리가 너희 중에 생겨서
19 이 저주의 말을 듣고도 심중에 스스로 복을 빌어 이르기를 내가 내 마음이 완악하여 젖은 것과 마른 것이 멸망할지라도 내게는 평안이 있으리라 할까 함이라
20 여호와는 이런 자를 사하지 않으실 뿐 아니라 그 위에 여호와의 분노와 질투의 불을 부으시며 또 이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를 그에게 더하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그의 이름을 천하에서 지워버리시되

 

(신명기 32:16)
16 그들이 다른 신으로 그의 질투를 일으키며 가증한 것으로 그의 진노를 격발하였도다

 

(에스겔 8:5)
5 그가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제 너는 눈을 들어 북쪽을 바라보라 하시기로 내가 눈을 들어 북쪽을 바라보니 제단문 어귀 북쪽에 그 질투의 우상이 있더라

 

이러한 표현이 가능한 것은 칠거지악 중의 질투와 하나님의 질투가, 비록 같은 형태의 단어이지만, 명백히 전혀 다른 상황에서, 전혀 다른 목적을 가지고, 전혀 다른 결과를 이루어 내는, 전혀 다른 성격의 단어이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의 질투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서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섬길 때 발현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복을 주신 백성들이 하나님을 떠나 아무런 의미없는 사물, 손으로 깎아 만든 사물을 신으로 섬기고 절할 때, 그들이 눈 앞에 놓인 구원의 길을 버리고 스스로 멸망의 길을 택하여 갈 때, 분노하시는 것이다. 이 분노의 근원을 생각해 보면, 말할 수 없는 안타까움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피로 구원하신 사람들이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거할 수 있는 집으로 가는 길을 버리고, 스스로 불못을 향해서 가는 어리석은 모습을 바라보시는 심정이 크나큰 안타까움, 곧 질투인 것이다. (어린 자녀를 키우는 부모가, 아이에게 주의를 주었음에도 알려준 대로 하지 않고 위험한 일을 당하거나 다쳤을 때, 속상하고 안타까운 마음과 더불어 화가 나는 기분과 같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모쪼록 이스라엘을 시기나게 해달라'는 당부에서 언급된 '시기'도 사극에서 쓰이는 시기와는 명백히 다른 뜻일 것이다.

성경을 보면...

지난 주에 들었던 '모쪼록 이스라엘을 시기나게 해달라'는 당부가 실은 필연적인 것이며,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임을 알 수 있다.

 

(신명기 32:21)
21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내 질투를 일으키며 허무한 것으로 내 진노를 일으켰으니 나도 백성이 아닌 자로 그들에게 시기가 나게 하며 어리석은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일으키리로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질투를 일으킨 백성들, 곧 허무한 우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진노하시게 만든 백성들로 하여금 '백성이 아닌 자들' 때문에 시기하게 하시며, '어리석은 민족' 때문에 분노하도록 만들겠다고 하셨다.

'시기'라는 단어를 매개로 하여 신명기 32:21과 로마서 11:11을 겹쳐서 보면,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하나님의 질투를 일으킴', '허무한 것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킴'은 '그들(이스라엘 백성)이 넘어짐'에 해당하고, '백성이 아닌 자', '어리석은 민족'은 '이방인'에 해당하며, '시기가 남', '분노가 일어남'은 '시기'로 표현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로마서 11:11)
11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신명기 32:21)
21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내 질투를 일으키며 허무한 것으로 내 진노를 일으켰으니 나도 백성이 아닌 자로 그들에게 시기가 나게 하며 어리석은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일으키리로다

 

이방인은 본래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으며, 거룩하신 하나님을 몰랐으니 지혜가 없고 명철이 없는 자들, 곧 어리석은 민족이었다.

 

(잠언 9:10)
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이스라엘 백성이 넘어졌을 때, 이방인은 무엇으로,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을 시기나게 할까?

...........

.......

...

 

마태복음 1장에는 아브라함과 다윗을 중심으로 한 예수님의 족보가 나온다. 특별히 마태복음 1:5-6절에는 눈여겨 볼 만한 기록이 나타난다.

 

(마태복음 1:5-6)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마태복음 1장에 기록된 예수님의 족보에는 오직 네 명의 여인의 이름만이 기록되어 있는데, 마태복음 1:5에는 그 중 두 명의 이름이 나타나 있다. 특별한 점은 이 여인들이 모두 이방인들이라는 것이다. 라합은 여리고성에 살던 기생이었으며, 룻은 모압여인이었다. 여인일 뿐만 아니라 당시의 기준으로 비천했으며, 이방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이스라엘과 대적한 민족에 속했던 여인들인 라합과 룻이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되어 있다는 점은, 우선적으로, 예수님을 믿는 유대인들에게 시기를 일으킬 수 있는 사항이다.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라합과 룻을 향해 '아니, 이런 이방여인 따위가 감히...'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방여인 따위'를 칭찬하신 바가 있다.

 

(마태복음 15:22-28)
22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리 질러 이르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하되
23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그를 보내소서
2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시니
25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이르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26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27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28 이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마치 라합이나 룻을 떠올리게 하는 가나안 여자는 개에 비유되는 모욕을 받으면서도 의연하게 이를 인정하고 예수님께 엎드린 자세를 바꾸지 않았다. 이 여인이 개에 비유되면서도 의연할 수 있었던 것은, 딸의 문제가 너무나 절박했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무엇보다도 예수님만이 자신을 도울 수 있는 분이시며, 너무나 위대하신 분임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모욕 가운데에서도 가난한 마음으로 끝까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붙들고 엎드려 있었던 여인에게 예수님께서는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칭찬하시며 귀신들린 딸을 고쳐주셨다. 이 가나안 여자는 라합과 룻을 떠올리게 한다.

가나안 여자의 태도처럼 라합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엎드렸다.

 

(여호수아 2:8-13)
8 또 그들이 눕기 전에 라합이 지붕에 올라가서 그들에게 이르러
9 말하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10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11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
12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도록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고 내게 증표를 내라
13 그리고 나의 부모와 나의 남녀 형제와 그들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살려 주어 우리 목숨을 죽음에서 건져내라

 

룻 또한 가나안 여자의 태도처럼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엎드렸다.

 

(룻기1:14-17)
14 그들이 소리를 높여 다시 울더니 오르바는 그의 시어머니에게 입 맞추되 룻은 그를 붙좇았더라
15 나오미가 또 이르되 보라 네 동서는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가나니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하니
16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17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라합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신 여호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온 세상의 하나님이시며,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구원하실 분이심을 믿었다. 룻 또한, 자신의 말을 들으시고 자신이 맹세를 어길 경우 자신에게 벌을 주시기까지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었다. 룻은 시어머니의 하나님을 자신의 하나님으로 섬겼을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서 시어머니의 백성을 자신의 백성으로 받아들이기까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버렸다. 그리고, 라합은 살몬과 결혼하고, 룻은 보아스와 결혼함으로써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 곧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이 사실이 마태복음 1:5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마태복음 1:5-6)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마태복음 1:5-6을 참고하면, 라합은 룻의 시어머니이자 다윗왕의 고조할머니가 되었으며, 룻은 라합의 며느리이자 다윗왕의 증조할머니가 되었다. 성경에 기록된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에 있어서, 또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통해 운영하신 구원의 역사에 있어서 상징적일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너무나 중요한 인물인 다윗왕은 바로 라합과 룻의 자손인 것이다.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이 라합과 룻을 향해 '아니, 이런 이방여인 따위가 감히...'라고 말하고 있을 때, 다윗왕이 조용히 다가와 할머니라고 부르며 그들의 품에 안긴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분명히 이방여인에 불과한 그들에게 놀랄 수 밖에 없을 것이며, 놀라움이 가라앉은 다음에는 그들을 시기할 것이다.

이방여인에 불과했던 그들이 어떻게 다윗왕의 계보에, 그리고 마침내는 예수님의 계보에 이름이 오를 수 있었을까를 생각한다면, 유대인들에게 시기가 나게한다는 의미의 실마리를 조금은 풀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유대인들을 시기나게 한다는 말씀을 먼저 이해하고, 다윗왕의 계보에 이름이 기록된 그들처럼 유대인들을 시기나게 함으로써, 유대인들을 예수님께로 이끌어가는 것이 이루어져야 할 일의 순서이다.)

딸의 병을 고쳐주시기를 간구하며 끝까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붙들고 엎드려 있었던 가나안 여인과 같이...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붙들고 하나님 앞에 엎드렸던 라합과 룻의 믿음. 그것이 바로 유대인들을 시기나게 할 '무엇'인 것이다.

하나님께 택함을 받았다는 자부심,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자부심, 누구보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한다는 자부심으로 가득한 백성에게 있어서 자신들보다 하나님을 더 잘 믿고, 신실하게 섬기고, 그분의 말씀을 더 많이 깨닫고 더 충성된 모습으로 말씀을 지키며 사는 이방인의 존재는 그들을 시기나게 할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바를 문자 그대로 지키는 사람들임을 생각할 때 더욱 그러하다. 

 

(신명기 6:4-9)
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그것이 가능한 까닭은 그들을 시기나게 하는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분을 믿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바와 같이, 성령께서 마가의 다락방에 임하신 후,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베드로가 소리 높여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을 때, 유대인들은 마음에 찔림을 받고 어찌해야 할지를 사도들에게 물었다.

 

(사도행전 2:37)
37 그들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시기'는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을 때에 생겨나는 것이다. 내 힘으로, 내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는 상대에 대해서는 시기가 생겨나지 않는다. 열심히 노력해서 이기면 되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누구이신지를 듣게 될 때, 지금까지 자신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생각해 왔는지를 되돌아보고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을 때, 그래서 '어찌할꼬'라는 물음을 가질 때, 그것은 '시기'의 시작이 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가져왔던 그들의 생각, 그리고 이제 알게 된 것에 대해 그들의 힘으로써는 어찌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시기'가 시작된 후에는, 그 마음을 달래야 할 것이다. 나보다 더 많이 아는 상대, 나보다 잘난 상대에게 어찌할 바를 몰라 '시기'를 느꼈다면, 이제 그 상대를 따라 잡아 나도 그 상대와 대등한 위치에 있어야 할 것이다. 마음에 찔림으로 말미암아 어찌해야 할지를 몰랐던 유대인들은 결국 세례를 받고 사도들과 같은 위치로 옮겨지게 되었다. 

 

(사도행전 2:40-41)
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4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유일한 구원의 길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이방인에게 이르렀다. 그리고, 이제 이방인의 입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강력한 전파가 이스라엘의 귀에 들려질 때, 이스라엘은 어찌할 바를 모를 것이고, 그리고 마침내는 세례를 받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길로 함께 걸어가게 될 것이다.

같은 유대인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유대인이 이 일을 감당하려 한다면 무수한 핍박이 따르겠지만, '이방인 따위'가 이 일을 감당한다면 유대인들을 '시기'나게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시기'가 유대인과 이방인을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 앞에 무릎 꿇게 할 것이며, 그 때에 모두가 함께 이 땅에 다시 오시는 예수님을 볼 것이다.

 

(마태복음 23:39)
39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제부터 너희는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할 때까지 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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