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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 2. 이단에 대한 대처

아리마대 사람 2023. 1. 15. 14:58

최근 이단에 관해 약간의 관심을 갖게 되어 자료를 조금 찾아보았다. 그리고 이 자료들을 나누고 싶어서 글을 올렸다.

자료를 참고하면 우리나라 이단들의 뿌리는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김성도에 근거를 둔 신비주의 쪽과 백남주에 근거를 둔 사이비 쪽이 결탁하여 직통계시의 주장을 사이비 교리로 만들었고, 후계자들에 의해 점차 보완되고 체계화되면서 이단이 된 것이다.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현혹시키기 위해서 각종 이설, 사설들이 더해졌고, 종말론이 이용되기도 했다. 이러한 이단의 계보 가운데 언변이 좋거나 사업수완이 좋은 자가 교주가 된다면 조직화, 기업화하여 규모가 크게 확장되기도 했다. 물론 규모와 비례하여 사회적으로 물의를 일으키게 된다.

이단과 관련된 글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최근의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 즉 신천지는 종래의 이단들과는 약간 궤를 달리하는 것 같다. 신천지는 자체 분석 결과라면서 '성서를 근거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 말씀의 탁월성'을 주장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신약성경의 약속대로 이 땅에 출현한 교회'라고 주장하며, 성경의 예언과 성취를 끌어다가 자신들이 하나님의 역사를 가르친다고 주장한다.

기독교로부터 하나님의 계시와 예수님의 구속이라는 구조만을 차용하여 자신들이 만든 구속의 교리를 만들어 끼우고, 때로는 혹세무민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종말론을 도입한 것이 종래의 이단들의 교리라면, 신천지는 성경말씀을 차용하여 해석하고 가르치면서 성경의 토대 위에 자신들의 교리를 끼워넣은 것으로 생각된이다. 그래서 더 진화되고 더 교활하고 더 효과적인 이단이 된 것이고, 교회의 입장에서는 더 껄끄러운 이단이 된 것이다.

이단은 기독교의 시작부터 존재해왔다. 어떤 형태로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정하며, 특히 사람들이 쉽게 현혹되도록 기독교의 가면을 쓰고 존재해왔다. 그러나 이단의 마지막은 그때나 지금이나 동일하다.

 

(갈라디아서 1:6-9)

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찌어다

 

하나님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명확하게 모르면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여 하나님의 말씀인 것처럼 위장한 교회 밖의 이단 또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여 하나님의 계시라고 내세우는 교회 안의 이단의 유치한 주장에 속게 된다.

관찰해보면 유감스럽게도 사회적으로 크게 물의를 일으키는 집단들은 대부분 기독교에서 파생된 이단들이다.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이는 조화가 아닌 생화에 벌레가 생겨나는 것과 같다. 진짜이기 때문이며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그만큼 벌레가 발생할 위험도 높다는 것이다.

교회 공동체, 목회자, 성도는 교회 밖의 이단과 교회 안의 이단에 속지 않을 방법을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냉정하게 자신을 바라본다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자신이 이단이 되어 남들을 속이지 않을 방법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과연 나는 하나님을 올바르게 알고 만나고 있는가.

과연 올바른 교회 공동체는 어떤 것인가.

과연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첫걸음으로서 교회 밖의 이단과 교회 안의 이단에 속지 않을 방법을 잘 가르치고 있는 글들을 참고해 보도록 하겠다.

 

교회 밖의 이단에 대해서

 

<총신대학교 심창섭 교수님의 글 참고>
교회가 이단이 발생한 후에 이단의 위협으로부터 교인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단이 발생하지 않도록 대책을 강구하는 것이 더욱 필요하다고 본다. 이단의 발생과 유혹은 단순한 인간적인 차원에서만 진단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이단의 배후에는 유혹하는 자 곧 사탄의 유혹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영적 전쟁이라고 볼 수 있다. 예수님도 복음사역의 초기에 광야의 시험을 통해 영적 전쟁을 경험한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사탄의 유혹이었고, 그 유혹하던 영은 잠시 떠나지만 다시 나타나 가룟 유다를 통해 결국 예수를 팔게 만든다.

 

(요한복음 13:2)
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바울도 고린도교회에 편지하면서 그의 사역을 방해하는 사탄의 세력을 언급하고 있다.

(고린도후서 11:13-15)

13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14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15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

성경의 이러한 교훈들은 복음의 사역을 파괴하려고 획책하는 영적인 세력들을 대항하여 교회는 믿음의 전신갑주로 무장하여야 함을 시사한다. 교회가 영적으로 저하되고 진리에 나태하며 도덕성에 회의하게 되면 반드시 유혹하는 자들이 머리를 들고 교회를 어지럽게 할 것이다. 특히 예수는 거짓 선지자들이 나타나 하나님의 자녀를 유혹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그래서 유혹하는 자에 의해 일어나는 이단들의 발생을 대처하기 위해 아래와 같은 대처방안을 제시하는 바이다.
현재의 이단대처 방안은 중세교회처럼 법적인 구속력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교리적, 지식적, 도덕적 대처 방안을 강구할 수밖에 없다. 어떤 면에서 이러한 대처 방안이 보다 본질적인 방어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방어책의 효과적인 설명을 위해 교회지도자의 역할과 교회(성도)의 역할로 나누어 보려 한다. 그리고 총회와 교단 차원의 대책에 대해 논하려 한다.

(1) 교회 지도자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이단들은 교회 내에서 발생하기 때문에 교회의 지도자들인 목회자들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다. 목회자들이 제대로 가르치고 영적인 바른 자세로 교인들을 양육할 때 이단의 발생을 막을 뿐 아니라 이단의 유혹에도 대처할 것이다. 목회자들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제시해 본다.
첫째, 목회자들은 이단에 대해 알고 있어야 한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은 이단이 나쁘며 이단들이 누군가라는 것은 어느 정도는 알고 있겠지만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알지 못하고 있다. 즉 이단들에 대한 초보적인 막연한 지식은 알고 있겠지만 이단들이 주장하는 교리들을 전체적으로 섭렵하여 언제라도 이단들을 대할 때 지도자로서 그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대항할 만한 지식이 없는 것 같다. 교회성장을 위한 많은 프로그램과 성경공부 그룹들은 활성화하지만 이단들에 대한 지식을 구체적으로 가르치는 프로그램은 등한시하고 있다. 그래서 자신도 교인들도 이단들에 대한 지식이 미약한 상태일 뿐만 아니라 무방비 상태로 방치하고 있다. 이런 상태에서 이단들이 교인들에게 확실한 지식을 가지고 접근할 때 교인들은 그들의 이야기에 설득력을 잃게 되고 흔들리게 된다. 교인들을 진리와 구원의 바른 길로 인도하는 책임을 맡은 목회자들이 먼저 이단들에 대한 지식을 확실하게 겸비해야 한다.
둘째, 목회자들은 이단들에 대해 교인들에게 교육을 시켜야 한다.
이단들이 유혹하는 대상은 교인들이다. 목회자들은 교인들이 이단들을 맞설 만한 지식을 갖도록 가르쳐야 한다. 무방비한 상태로 버려두면 교인들은 이단들에 대할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여호와의 증인들이 교인들의 집을 방문하면 교인들은 이들에 대한 지식이 없어 그냥 문을 잠근 채 상대하기도 두려워한다. 그리고 목회자들도 그렇게 가르친다. 이단들이 방문하면 무조건 거절하고 대화하지 말라고. 물론 좋은 방어책이고 최선의 방법일 수가 있다. 이단들은 설득이 불가능할 정도로 완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에 대해 내가 알고서 대하지 않는 것과 알지 못하고 거두절미하는 것과는 다른 이야기다. 중요한 것은 교인들이 이단들에 대해 알고 있기 때문에 그들과 상대하지 않는다는 확신을 갖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단에 대해 전문지식을 가진 인사들을 초청해서 강의를 듣는 것도 좋겠지만 그런 일회용의 가르침이 아니라 평소에 목회자들이 이단들에 대해 교인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더욱 효과적이며 이단으로부터 교인들을 보호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라고 본다.
셋째, 목회자들은 이단을 대처하기 위해 자신이 건전하고 올바른 영성을 가져야 한다.
대부분의 이단들은 불건전한 영성체험에서 비롯된다. 한국의 신흥사이비이단들은 대부분 무분별한 체험신앙에 기초하고 있다. 개인적인 산기도, 기도원, 특별은사집회, 성령체험집회 등 은사중심의 집회나 기도원의 기도운동을 통해 개인적인 체험신앙을 경험한 자들이 주로 이단운동을 일으킨다. 목회자들은 자신은 물론이고 교인들이 이러한 무분별한 체험중심의 집회에 참여하는 것을 감시하고 지도해야 한다. 유감스러운 것은 목회자 자신들이 이러한 집회를 유도하면서 영적인 분별력을 상실하여 유혹하는 자의 간계에 넘어가는 경우들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목회자들은 계시체험이나 성령체험을 경험한다는 이들의 유혹에 현혹되지 말고 말씀 중심의 인격적인 건전한 영성과 믿음에 확고하게 서 있어야 하며 또한 교인들을 가르쳐야 한다.
넷째, 목회자들은 윤리적인 삶과 경건생활에 충실해야 한다.
대부분의 이단들의 교회이단 현장에는 목회자들의 부실한 삶이 연계돼 있다. 목회자들과 교인들의 경건한 생활과 행실보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비하고 이단들의 발생에 대처하는 좋은 방법은 없을 것이다. 베드로는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

 

(베드로후서 3:14)

14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목회자가 교회의 지도자로서 바로 서 있지 못할 때 이단들은 활기를 찾게 된다. 목회자들이 금전을 탐하고 교인들의 수준을 생각지 아니하고 고급 승용차를 타고, 교권을 남용하며, 무분별한 행위를 한다면 이단들의 교주가 하는 행동과 차이점이 없을 것이다. 목회자들이 자신을 절대적으로 진정한 목회자로 믿도록 하면 된다. 거기에는 다른 비결이 없다. "금식과 기도, 말씀, 봉사, 교제, 희생, 정결, 근검절약, 찬양, 예배 등의 영성훈련 외에 주님의 형상을 닮고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는 방법은 없다"는 것을 알고 실천하면 된다.
다섯째, 목회자들은 이단들에 대한 정확한 정보 확보와 알림에 노력해야 한다.
정보화 사회에 이단들의 활동은 다양해졌다. 단순한 책자나 방문의 범위를 넘어 정보매체를 통해 자신들을 위장하고 접근한다. 넘쳐나는 정보를 통해 교인들은 쉽게 이단들의 유혹에 넘어 갈 수 있다. 왜냐하면 이단들의 인터넷 페이지는 정통교회의 홈페이지와 구별이 안되게 그들의 정보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단들은 그들의 명칭을 바꾸기도 하고 정통교회의 단체들과 유사하게 개칭하여 사용하고 있다.
여섯째, 목회자들은 성도들에게 올바른 교리교육을 시키고 성경을 분변하여 이해하는 말씀교육을 시켜야 한다.
보통 이단들의 유혹에 빠지는 자들은 초신자들이거나 자신의 진리에 확신이 없는 자들이다. 목회자들은 교인들이 이단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도록 교인들에게 성경의 바른 진리를 확실히 가르쳐야 한다. 예를 들면 구원론과 기독론, 그리고 교회론 등에 대한 확실한 지식을 성경에서 교인들이 갖도록 해야 한다. 올바른 성경지식은 불건전하고 이단적인 성경해석을 금방 분별하도록 영분별의 은사를 주기 때문이다.

(2) 교회의 역할이 중요하다.
이단대처의 최선의 방법은 교회의 역할이며, 교회의 역할은 곧 교회의 본질 회복이다. 이단 발생의 진원지인 교회가 교회다워지면 이단은 근절될 것이다. 교회의 부조리, 부패, 영적 능력의 상실 등이 이단이 나타나는 주요한 원인들이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교회가 교회의 본연의 모습을 상실할 때 이단들이 우후죽순처럼 일어나곤 하였던 것이다. 중세의 이단들은 십자군 원정 등으로 교회가 정치화되고 부패한 가운데 나타났다. 그리고 근대교회의 이단들도 급변하는 사회의 변화와 혼돈 속에서 교회의 본질을 잃어버린 채 교회가 분열을 하며 확고한 성경의 가르침에 서 있지 못할 때 나타난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이단의 발생을 근절하기 위한 최선책은 바로 교회가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론적으로 이단 발생의 요소들인 정치, 사회, 문화 등을 간접적인 원인들로 볼 수 있지만 직접적 요소는 교회가 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최병규 박사는 <이단진단과 대응>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필자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이단, 사이비 분파 발생 요인들 중 대단히 중요한 것은 곧 '기존 기독교회들이 기독교 본연의 모습들을 실천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한 반작용'이라는 것이다."
교회의 본연의 모습의 상실은 곧 이단들의 발흥의 시작임을 암시하는 말이다. 이단들의 발생이 교회의 본질의 상실에 대한 반작용으로 본다면 이단의 대처는 바로 교회의 본질 회복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는 말이다. 교회의 본질 회복을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지적할 수 있겠다.
첫째, 성경에 나타난 교회의 본질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생명력이 넘치는 것을 의미한다.
사도행전 2~5장에 나타나는 초대교회의 모습은 하나님의 말씀을 "귀로 듣고 마음으로 믿을 뿐 아니라 몸으로 느끼고 삶에서 실천하는 체험"을 하는 교회였다. 성령의 능력으로 인해 세워진 초대교회는 베드로의 설교로 인해 3천명이 회개하고 모인다. 그런데 그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도행전 2:42)

42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사도들의 가르침은 생명력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 아니한다. 그 가르침에 따라 바로 역동적인 신앙생활이 전개된다. 즉 교회가 생동력 넘치는 공동체로 움직임을 보여 준다. 바로 이것이 사도 시대 교회의 생명이었다. 사도 시대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는 교회였다. 그러면 현대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이 죽었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있지만 그것은 죽은 말씀과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말씀따로 행동따로 믿는 풍조가 이미 오래전부터 교회의 생리로 자리 잡혀 말씀이 선포되어도 효과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문제다. 이단들은 교주의 말을 죽으라고 맹종한다. 성경의 잘못된 해석이라도 교주가 한 해석이라면 목숨을 걸고 맹신한다. 그러나 기성교인들은 다르다. 성경말씀이 그들의 절대적인 삶의 기준이 되지 아니한다. 입으로는 고백하고 머리로는 학습되지만 가슴은 냉랭하고 손발은 꽁꽁 묶여 있다. 그래서 영적으로 죽은 송장들이 걸어다니는 것과도 같다. 이단들이 보면 정말로 측은히 여겨져서 영혼을 구원시키고 싶은 사람들이다. 교회는 말씀의 권능에 복종하고 하나님의 초월적인 은혜를 말씀을 통해 경험하는 역사로 인해 생동력 있는 활기찬 신앙을 회복해야 한다. 오늘날 교회가 이러한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지 아니하면 언제라도 우리 가운데 이단과 같은 이리떼들이 넘나들게 되어 있는 것이다.
둘째, 교회의 본질회복은 성도의 교제를 통한 살아 움직이는 공동체성 회복을 의미한다.
교회는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경험한 성도들의 모임이며, 그것은 곧 그리스도의 모습을 본받아 나눔과 돌봄과 치유의 공동체임을 의미한다. 말씀의 능력을 삶을 통해 경험하는 것이다. 성경은 바로 그런 모습을 교회의 참 모습으로 기록하고 있다.

(사도행전 2:44-47)

44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45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46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이때의 공동체는 오순절 날에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경험한 120명 정도의 성도들과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3000명의 사람들로 구성된 모임임을 알 수 있다. 3000명 중에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데 동조한 무리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회개하여 120명의 성도들과 함께 어울려서 이제는 대적자로서가 아니라 형제와 자매로서 한우리가 된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초대교회가 하나님의 권능과 사랑을 경험하고 함께 녹아지고 어울려 생명체를 이룬 성도의 교제가 있었음을 보여 준다. 제도화된 교회의 구조와 기능, 그리고 기계적인 교인 서로간의 관계형성으로 생명력을 상실한 현대교회와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함께 있어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서로 경험하지 못하고 신앙인격적인 교제가 메말라 버린 현대교회는 이단들 앞에 무능한 채로 노출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셋째, 교회의 본질은 도덕적 윤리적으로 깨끗하고 사랑의 실천하는 모습을 갖는 것이다.
이단들이 기존교회에 대해 실망하고 등지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이 교회의 정통교리를 싫어해서가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그들이 등을 돌리는 이유는 기존교인들의 신앙생활에 대한 실망이 크기 때문이다. 교인들의 각자의 신앙의 삶이 바로 서지 못하면 이단들은 교회내에서 언제나 생길 수가 있다. 교인들의 말과 행동이 서로 다르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느끼기는커녕 서로 간에 다투고 갈라서는 분쟁이 있는 한 이단들의 발생 가능성은 항상 잠재해 있는 것이다. 사도 요한도 적그리스도를 대적하여 승리하는 비결은 사랑의 실천밖에는 없으며 사랑의 유무가 적그리스도를 구별하는 척도라고 하였다. 기존교회의 스트레오 타입의 신앙에 비해 이단들은 너무나 사랑의 띠로 서로 연결되어 있는것을 알게 된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회복하여 형제, 자매와 같이 교인들이 친밀감의 유대를 가지게 되면 이단들은 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교인 전체가 윤리적, 도덕적으로 경건한 삶을 추구한다면 이단들이 도리어 회개하고 그리스도의 품으로 돌아오는 역현상이 나타날 것이다.
넷째, 교회는 성도들이 성경적인 진리를 확실히 믿고 지키는 본연의 의무를 갖고 있다.
이단들에게 현혹되지 않기 위해서 성도들이 교회를 보호하고 지켜야 할 의무를 가져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이 목회자들에게만 맡기신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인 성도 각자가 그리스도가 피흘림의 대가로 세운 교회를 이리들이 범람하지 못하도록 지켜야 한다. 성도는 단순히 예배보러 오는 수동적인 예배수혜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교회가 비진리로 인해 상처받지 않도록 스스로 예수가 전해 준 복음의 진리를 확실히 믿고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성도들은 진리의 깨달음과 믿음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과의 영적교제인 기도의 능력을 가져야 한다. 언제나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는 바울의 경고 말씀이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한 말이다. 바울은 성도의 영적 생명이 기도와 말씀에 있음을 간파한 것이다. 성도느느 그만큼 하나님의 진리를 사수하기 위해 깨어 있어야 함을 말하는 것이다. 이단들에 대한 대처는 목회자들의 전용물이 절대 아니다. 성도 한사람 한사람이 각자 깨어 있어 성경의 진리말씀에 굳게 서 교회를 지켜나갈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진리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성도들도 이단들에 대한 지식을 익히고 비판적인 이론들을 연구해야 할 것이다. 적에 대한 아무런 지식이 없어 무방비한 상태에서 이단들에 노출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것이다.

(3) 교단차원의 대책이 필요하다.
이단들은 위협적이며 공격적이고 또한 조직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개교회나 성도 개인이 대처하도록 교단에서 방치할 수는 없다. 범교단과 총회차원에서 이단대책을 위한 결단과 시행이 따라야 한다. 몇가지 대처 방안을 제안하려 한다.
첫째, 교단 차원의 무분별한 목회자 배출을 개혁해야 한다.
이단들의 교주는 대부분 신학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거나 비정상적인 신학교육을 받은 자들이다. 지금도 부실신학교에서 많은 목사들이 배출되고 있다. 교단적으로 신학교육의 정상화를 위해 노력을 해야 한다. 신학교에서 제대로 배우지 못했거나 잘못 배운 목회자들이 이단들에게 쉽게 동조하거나 이단적인 집단에 가입한다. 그리고 이단적인 교회를 양산하고 있다. 목회자를 배출하는 신학교육을 정상화시키는 것이 이단발생을 막기 위한 총회적인 차원의 일차적인 의무일 것이다.
둘째, 교단총회는 무분별하게 타교단과 교회 그리고 목사를 영입해서는 안된다.
건강한 육체에 조그마한 전염병균이 잠입하면 몸 전체가 몸살을 앓게 되는 것과 같이 총회에서 이단적인 자질을 가진 목회자들과 교회들에 대한 아무런 검정도 없이 무분별하게 그들을 영입한다면 결국은 이단들이 발생할 수 있는 못자리를 마련해 주는 셈이 된다. 목회자들과 교단들이 영입되어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의 하나됨을 추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분별없는 영입은 교단 전체가 고통을 감내해야 할 위험을 안고 있는 것이다. 특별히 이단성의 유무에 대한 확실한 검정이 필요하다고 본다.
셋째, 교단총회는 이단 연구나 대책을 위한 상설기구를 만들어야 한다.
이단들을 효과적으로 대처하고 사전에 발생을 막기 위해서는 교단차원의 이단연구를 위한 상설기구를 만들어야 한다. 매년 총회마다 이단연구위원들이 선정되긴 하지만 지속성이 결여돼 있기 때문에 이단에 대한 축적되고 일관적인 대처 방안을 세울 수가 없다. 이단에 대한 정보와 지식은 물론 자료들을 각 교회에 배급하고 지도하며 정책을 세우는 상설 기구가 총회차원에서 설치되어야 한다. 즉 교단 산하의 교회를 보호하기 위해 이단들에 대해 전문적인 연구와 대책의 강구가 시급하다는 것이다. 이단들은 교묘하며 악을 행하는 데 지혜롭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재림할 때까지 교회는 경각심을 늦추지 말고 양무리들을 이리떼들로부터 보호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성도와 목회자 그리고 교단이 총체적으로 이 사역을 위해 매진해야 할 것이다.

 

교회 안의 이단에 대해서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이승구 교수님의 글 참고>

이단에 대처하려면 교회 내에서 성경에 뿌리 내린 언어를 써야 한다. 이단들은 기존 교회보다 좀 더 비성경적으로 표현하고 가르치는 데까지 나아간다. 그런데 기존 교회에서 이상한 표현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이단의 표현 방식이 '좀 지나치네'라고만 생각할 뿐 근본적으로 잘못됐다는 인상을 받지 못하는 일이 자주 발생한다. 즉 성도들이 이단들의 주장을 들을 때 "잘못됐다!"라는 판단이 서야 한다. 그런데 쉽게 분별을 못하고 이단에 빠지는 이유는 이미 정통교회에서 이단들의 주장을 수용할 만한 언어들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병마

흔히 "병마를 물리쳐 주시고..."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그러나 이런 말을 사용하면 각종 병과 이를 주관하는 귀신을 연결하는 이단의 가르침으로 흐를 수 있다. 이런 잘못을 뿌리부터 제거하려면 그리스도인들이 병마 같은 비성경적이고 불건전한 용어를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

선포기도

기도는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지 다른 존재나 사람이 들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삼위일체 하나님과 교제하며 대화한다는 성경적 기도 개념에 충실하면 기도에 '선포'라는 발상 자체를 섞을 수 없다. 우리 주변에서 이런 기도를 아무렇지 않게 드리는 이유는 종교적 행위를 할 때 성경적 기초를 분명히 하지 않거나 그저 효과만 거두면 된다는 생각에 너무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잘못된 습관과 언어 사용에서 벗어나 참으로 삼위일체 하나님과 깊이 대화하는, 진정한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음성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거나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표현을 없애나가야 한다. 초신자들은 이런 표현을 오해하기 십상이다. 이런 경험이 없는 자신들은 이등 신자라는 의식을 계속 품게 되고 더 위험하게는 일종의 직통계시적 경험을 사모하는 신비주의자가 된다. 성경이 기록되기 이전에 계시를 주셨던 그 방식을 하나님이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든 그리스도인은 명심해야 한다. 성령님은 이미 계시한 성경의 가르침을 사용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시고, 이를 구체적 정황에 적용하여 하나님의 백성답게 판단하며 살아가게 하신다.

 

모든 교회가 이 같은 일을 삼가고 주의한다면 이단·사이비 운동은 뿌리가 끊어지고, 성경적이고 성령 충만한 분위기가 우리 주변에 형성될 것이다. 종교적 언어를 많이 사용하는 사람이 아니라 종교적 언어를 정확히 사용하는 사람이 영적으로 성숙하고 본받을 만한 신앙을 소유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