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속에 잠깐 스쳐가는 말씀 한 조각

말씀 한 조각 만으로도 많은 것을 볼 수 있다...

◇ 생각 한 조각

불혹

아리마대 사람 2016. 11. 6. 00:45

어릴 적, 학교 다닐 때 배운 것 중에 나이에 따른 명칭이 있었다. 이 명칭들은 논어(論語)의 위정(爲政)편에 나오는 말로서 공자(孔子)가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고 학문이 심화된 과정을 떠올리며 한 말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나는 열 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 섰으며, 마흔 살에 미혹되지 않았고, 쉰 살에 천명을 알았으며, 예순 살에 귀가 순했고, 일흔 살에 마음이 하고자 하는 바를 따랐지만 법도에 넘지 않았다."
 
15세 - 지학(志學) - 학문에 뜻을 둠으로써 인생의 목표를 세운다는 뜻이다.
30세 - 이립(而立) - 스스로 인생을 세울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40세 - 불혹(不惑) - 세상일에 정신을 빼앗겨 갈팡질팡하거나 판단을 흐리는 일이 없게 되었다는 뜻이다.
50세 - 지천명(知天命) - 하늘의 뜻을 안다는 말이다.
60세 - 이순(耳順) - 귀에 들리는 것이 순해져서 사사로운 감정에 얽매이지 않고 객관적으로 들을 수 있다는 뜻이다.
70세 - 종심(從心) - 마음가는대로 행동을 해도 법도를 어기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렇듯 삶이 이루어져 감에 따라 사람도 그 속이 깊어가게 마련일텐데...
 

이러한 단계를 지칭한 말 중에 가장 흔히 접하는 말은 '불혹'인 것 같다.
불혹...
쉽게 마음을 뺏기지 않는 나이...
세상사에 쉽사리 흔들이지 않는 나이...
공자의 시대로부터 꽤 시간이 흘렀지만, '불혹'이란 나이가 공감을 얻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마흔살 무렵은 살아온 날을 되돌아보고 살아갈 날을 내다보며 새로이 삶을 다짐하는 때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또한, 삶을 단단히 다지고, 삶의 호흡을 크게 한번 들이쉬고 내쉼으로써 삶의 호흡을 안정시키는 때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또한, 마흔살 무렵의 사람에게는 기대는 사람들도 많고, 기대를 거는 사람도 많아서 흔들리지 않기를 바라는 때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공자의 말에서 비롯된 것은 아니지만, 흔히 나이 61세를 가리켜 환갑이라고 한다. 살아온 날이 어느덧 한 갑자가 지났다는 말이다. 예전에는 한 갑자를 사는 사람들이 흔하지 않았기에, 나이 61세를 환갑이라고 칭하며 축하를 했다. 아마도 놀라움과 부러움을 마음이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나이 62세가 되면 진갑이라고 칭하며, 인생이 한 갑자를 거쳐 새로운 갑자로 나아감을 또한 축하했다. 나이 70세가 되면 고희라고 칭하며 축하를 했다. 고희라는 말은 드물게 오래 살았다는 뜻 정도가 될텐데, 진심으로 놀라움과 부러움을 담아 축하했을 것이다. 예전에는 60년, 70년을 사는 것이 그리 흔한 경우가 아니었던 까닭이다.
60세, 70세가 드물었던 시대에 나이 40세는 어떤 의미였을까.
60세 무렵이 되면 크게 축하했던 것을 볼 때, 나이 40세라면 대개 부모님이 돌아가실 무렵의 나이였을 것이다.
살면서 사람이 겪는 여러가지 일들 중에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일만큼 마음에 물결을 일으키는 일이 있을까 싶다. 크게 일렁이던 슬픔이 가라앉고 나면, 마음의 수면에는 오래도록 잔잔한 물결이 퍼져나간다. 고마움과 미안함이 일렁이고 나면, 삶의 이치과 죽음의 의미가 물결처럼 마음에 퍼져 나간다. 그리고 나면, 일상은 변한 것이 없지만, 삶을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게 된다.
큰 일을 겪었기에 작은 일에 연연하지 않게 되고, 부모와 자식의 의미를 조금은 알게 되었기에 자녀들에게 좀 더 따뜻한 부모가 되어지고, 인생의 과정, 특히 끝을 지켜보았기에 좀 더 깊은 생각, 특히 자기 인생의 끝을 염두에 두고 살아가게 된다. 그래서, 세상 살아가는 모습이 좀 더 진중하고 여유로워질 것이다.
그 나이가 40세 무렵이었을테니, 굳이 공자처럼 학문을 깊이 닦아서 40세가 되지 않더라도, 아마 그 나이 무렵이면 자질구레한 세상사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고 살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그리고, 그 나이가 되면 앞서서 인생을 살아갔던 분들을 보며, 인생의 다 살고난 뒤를 생각할 수 있게 되지 않았을까 싶다.
 
(시편 90:10-12)
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11 누가 주의 노여움의 능력을 알며 누가 주의 진노의 두려움을 알리이까
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살다보니 어느덧 불혹을 넘어서게 되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세상사에 쉽사리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만큼 철이 들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핑계를 대자면, 세상사에 마음을 뺏기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 슬플 것 같기 때문이다. 마음이 요지부동인 만큼 호기심도, 재미도, 흥분도, 열정도 사라진 상태가 되어 버린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마음은 철이 덜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람의 인생을 생각하는 데는 더 흥미가 느껴지게 되어 즐겁다. 내 삶과 다른 사람들의 삶을 바라보면서 이 삶을 준비하고 선물해 주신 분을 찾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것도 철이 든 것이라고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나님께서는 그저 사람들이 서로의 살아가는 모양새를 보는 것만으로도 철이 들도록 인생을 만들어 두신 것 같다. 그리고, 철이 들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고 만날 수 있도록 길을 열어두신 것 같다. 하나님께서 주신 삶의 구조가 참으로 신비롭다.
 
P. S. 평범한 가정에서 부모님께 사랑을 받으며 형제들과 티격태격 자라는 것이 건강한 사람으로 자랄 수 있는 비결이 아닐까 싶다. 또한, 제 나이에 겪을 일을 제 때에 겪고 사는 것이 성숙한 사람으로 자랄 수 있는 비결이 아닐까 싶다. 평범하지 않은 환경에서 자라는 것, 반드시 사람이 겪게 되는 일들을 제 때가 아닌 때에 겪는 것이 사람을 병들게 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니 참으로 안타깝다. 더구나, 매우 중요한 위치에 있는 분을 보며 이걸 새삼 깨닫게 되다니 참 안타깝고 한편으로는 허탈하기까지 하다.